일본군 조선 주둔 허용, 침략 빌미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된 조선은 큰 혼란을 겪는다. ‘외국의 선진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파와 ‘해외문물이 조선의 전통과 문화를 해친다’며 개화를 반대하는 수구파가 팽팽히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별기군’이 창설된다. 양반 자제들로 구성하고, 일본군 교관이 근대식 군사훈련을 하는 새로운 군대조직이다. 당연히 별기군 군인들은 우대받고, 구식 군인들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당한다. 급료로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는 일까지 벌어진다.
결국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한다. 임오군란(1882년)이다. 자신들이 푸대접을 받는 게 왜별기(倭別技·별기군을 속되게 부르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한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 병영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와 일본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한다. 그들의 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명성황후와 황실의 외척 세력인 민씨 일파 등 위정자들에게까지 칼날이 향한다.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는가 하면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기도 한다.
제물포조약 원본.
난동이 갈수록 험악해지자 고종은 사태수습을 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부른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뒷방 늙은이’로 있던 흥선대원군은 구식 군인들의 요구사항들을 들어주면서 사태를 무마해 단박에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난리통에 죽었을 것이라고 믿은 명성황후는 살아 있었고, 민씨 일파가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청나라는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허울을 내세워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게 한다.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한 후 조선의 내정을 직·간접으로 간섭하던 오장경은 자신의 군영을 찾아온 흥선대원군을 아예 톈진으로 납치해 감으로써 그를 또다시 정권에서 몰아낸다.
흥선대원군의 퇴출은 궁지에 몰린 일본에 새로운 활로가 된다. 일본은 즉각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고, 군란으로 입은 일본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한다.
흥선대원군이 없는 조선은 ‘고양이 앞의 쥐’가 돼 일본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만다.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된 제물포조약을 맺은 것. 그날이 1882년 8월30일이다.
이 조약은 일본이 과거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 당한 것을 조선을 상대로 그대로 재현한 불평등조약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주국가로서의 위신과 체면이 크게 깎였으며, 일본의 침략을 극복하기 어렵게 됐다.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스스로 허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