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황현진 | 문학동네
용화공고 3학년 태만생. 이름만큼이나 느긋하던 그의 삶에 어느 날 변화가 찾아온다. 미장이 아버지와 잠꾸러기 어머니가 그를 놔두고 미국 이민을 가겠다고 나선 것. 커다란 검정 여행가방을 산 그들은 아들에게 무사히 졸업하고 군대 마친 뒤 오라면서 가끔 마른 멸치와 고추장을 부쳐달라는 부탁을 남긴 채 훌쩍 떠난다.
아버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101-9번지의 집을 마흔 살의 소설가에게 월세 35만원에 세놓고, 그 돈을 받아 살라면서 아들에게 용화공고 바로 앞에 옥탑방을 얻어준다. 또 옥탑방 주인인 횟감 유통업자에게는 3년간의 집세 대신 자신이 끌고 다니던 포터 트럭을 넘긴다.
혼자 남겨진 만생은 ‘절친’ 태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고무장갑 공장에 위장취업하고 현장 실습을 핑계로 학교를 작파한다. 대신 태화가 일하는 이태원 짝퉁 명품백 가게에 취직한다. 그러나 단속반의 차량번호를 제대로 외우지 못한 만생은 태화가 거리에 나가 일본·중국인 관광객을 데려오는 ‘삐끼’로 일하는 동안, 창고를 왔다갔다 하면서 백을 나른다.
이 소설은 만생을 가운데 놓고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중국집 배달부였던 만생의 아버지는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어머니를 꼬셨다. 만생이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한강로 101-9번지 이웃들의 삶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101-8번지에 혼자 사는 할머니는 버려진 개와 고양이를 키운다. 101-7번지에는 아내를 유방암으로 잃은 남자에게 시집온 50대 여자가 산다. 101-6번지 아줌마는 만생의 아버지와 바람났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 동네를 떠났다. 101-5번지 노처녀는 수은 함량이 높다고 보도된 화장품을 팔던 외판원이다.
이런 사정은 만생이 일하는 이태원 일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명품백 가게의 ‘개사장’은 짝퉁을 팔다가 감방을 두 번이나 다녀왔으며 여전히 단속반을 경계하느라 개처럼 입구를 지키고 앉아있다. 가게 단골인 미미는 나이트클럽에서 번 돈으로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로, 가수 데뷔를 준비 중이다.
별다른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생은 조금씩 어른이 돼 간다. 중학교 때 좋아했던 동급 여학생 오선이 친구 태화를 좋아하는 바람에 실망한 그는 오선의 친구인 유진과 얼떨결에 키스를 하고 성관계까지 맺는다. 반면 오선에게 통 관심이 생기지 않는 태화는 자신이 미미처럼 동성애자가 아닐까 궁금해한다. 이런 네 사람이 어울리는 만생의 옥탑방 ‘만생호’는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루저’ 청소년들의 치기와 열기로 가득하다.
그러던 어느 날, 몸살 기운을 느낀 채 가게에 나갔던 만생은 꾸물대면서 짝퉁 가방을 들고 오다가 단속반원들에게 들켜 개사장을 다시 감방으로 보내게 된다. 응급실로 실려갔던 그는 강릉 앞바다에서 검정색 여행가방 속에 들어있는 남녀의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듣는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변사체가 부모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강릉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던 만생은 나이트클럽 선전 포스터에서 가수가 된 미미의 모습을 발견하고 발길을 돌려 그를 찾아간다. 과연 변사체는 만생의 부모일까, 아닐까.
만생의 삶은 팍팍하지만, 그는 기죽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제목대로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란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다시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일어선다.
작가 황현진씨(32)는 “공고에 다녔던 남동생을 보면서 만생이란 인물을 떠올렸다. 만생이란 이름에는 ‘범박한 모든 생’이란 뜻이 있다”면서 “만생의 부모가 낯선 미국으로 떠났듯이 만생 역시 이태원이란 ‘청소년통행금지구역’에서 비현실적인 모험을 하도록 설정했다”고 말했다.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