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분노(憤怒)라고 해도 켜와 결이 같지는 않다. 부아를 돋우는 언동에 발끈하는 개인적인 것도 있고, 가랑비에 옷 젖듯 누적된 불만에서 비롯된 집단적 노여움도 있다. 격렬한 공화혁명을 겪은 프랑스에서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란 말이 쓰인다. 분노·적의(敵意)를 뜻하는 영어의 ‘resentment’와 비슷하지만, 담긴 뜻이 더 다채롭다. 사전적 의미로 르상티망은 불안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라고도 하고, 아등바등한들 제자리 걸음 하기도 벅찬 삶의 허무함에 대한 억압적인 각성을 뜻한다고도 한다.
민주주의를 통해 제어되던 르상티망을 신자유주의가 다시 불러내고 있다. 리처드 세넷은 <뉴캐피털리즘>에서 무한경쟁의 시장경제가 삶이 불안정해진 보통사람들로 하여금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집단적 불만을 품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경제적으로 생긴 르상티망의 불똥은 언제든 정치적으로 비화될 휘발성을 지니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원망, 성장의 과실을 독점하는 내부 적들에 대한 적의와 분개의 밑바닥에 르상티망이란 강력한 사회적 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 시장경제 체제의 수도라는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인의 분노가 날로 커지고 있다. 3주 전만 해도 낙담한 청년들의 일탈 정도로 여겼던 주류언론들조차 ‘얽히고 설킨 분노’가 분출되고 있다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눈치가 역력하다. ‘반 월스트리트 운동(Anti-Wall Street Movement)’이란 적극적 표현이 등장했는가 하면, 지도부도 지속성도 지향성도 모호한 일시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1%에 대한 99%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데 이론이 없어 보인다. 르상티망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의미다.
미 정치경제학자 데이비스 플록은 얼마 전 방한 강연에서 정책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의 빈곤을 꼬집었다. 세상은 불안해지고 르상티망이 커지는데도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낡은 이분법에 갇혀 있는 것이야말로 위기라는 지적이다. 월가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속단할 수 없다. 한 참가자는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고 했다. 낡은 틀로 재단할 수 없는 변혁 양태라는 것이다. 르상티망은 혁명과 변화의 마그마와 같다.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에서 르상티망이 용암으로 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