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의 일이다. 분음(汾陰·산시성 완잉셴)의 사당 옆 마당에서 정(鼎), 즉 청동솥 하나가 발굴됐다. 최초의 고고학 발굴이었던 셈이다. “국보급 유물이 출토됐다”는 낭보가 삽시간에 퍼졌다.
“길조다. 이 청동솥(寶鼎)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바쳐야 한다.”
한 무제는 한껏 예를 갖춰 하늘제사를 올렸다. 한나라는 왜 이렇게 정(鼎)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까.
하나라 우 임금은 아홉 주(州)의 제후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아홉개의 정(구정·九鼎)’을 만들었다. 우 임금은 구정에 제물(祭物)을 삶아 하늘제사에 사용했다. 이후 성군이 나라를 열면 구정을 옮겨갔다. 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구정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정은 국가를 상징했다(사진은 상나라 때의 청동솥). 역대 제왕들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정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됐다.
진시황(기원전 247~210)은 사수(泗水)에 빠진 구정을 찾으려 1000명을 들여보냈다. 목욕재계에 기도까지 드렸다. 강바닥까지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진나라는 천하통일 후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기원전 607년 때의 일이다. ‘춘추5패’로 두각을 나타낸 초(楚)나라 장왕이 주나라 도성 외곽에서 화려한 열병식을 열었다. 천자국(주나라)의 앞마당에서 감히 제후국의 군주(초 장왕)가 위세를 뽐낸 것이다. 주나라 왕이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초 장왕을 위로했다. 장왕이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온 김에 주나라에 있는 구정을 한 번 보고 싶소. 무거운지 가벼운지….”(초 장왕)
이는 “내가 (정권의 상징인) 구정을 들고 갈 수도 있다”, 즉 “천하는 이제 나의 것이 아니냐”는 협박이었다. 왕손만도 물러서지 않았다.
“덕이 밝으면 구정은 작아도 무거워서 옮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혼란하면 구정은 커도 가벼워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德之休明 雖小必重 其姦回昏亂 雖大必輕). 아직 왕(장왕)의 때가 아니니 구정의 경중을 묻지 마시지요.”(<사기> ‘주본기’ ‘초세가’ ‘진시황본기’ ‘효무본기’ 등)
초 장왕은 머쓱해져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구정의 무게’를 묻고 있는 이들이 있다. 천하를 얻으려는 대권후보들이다. 어떨까. 과연 구정을 들고 갈 자격이 있는가. ‘왕손만’이 묻고 있다. 민심의 물음이다. “그대는 지금 덕행을 쌓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