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글 주영재·사진 이상훈 기자

역사를 소설처럼 짜임새 있게 풀어내는 ‘저술가’

‘사연만리(史緣萬里).’ 역사학자 이덕일(5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요즘 서명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남기는 글귀이다. 역사의 인연으로 지금껏 저술로 다룬 인물들을 만나게 됐고 이들의 이야기로 다시 독자들과 만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역사저술가로 폭넓은 대중과 호흡하고자 하는 바람을 보여준다.

그는 대중적 역사저술가의 길을 처음 열었다. 숭실대에서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대학강단에 서는 대신 전업 역사저술가의 길을 선택했다. 전인미답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고민이 깊었다. 사학의 특성상 교수직이나 연구소에 자리 잡지 않으면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가 교수의 꿈을 접은 데는 ‘비주류로서의 자각’이 작용했다. 한국사학계가 명문대 출신과 식민사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서, 학자를 상대하는 역사가 아니라 대중을 상대하는 역사로 길을 택했다.

그는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데뷔작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주류사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연구도 함께했다. 13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러 권의 화제작을 내며 한국의 대표적인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지금까지 낸 작품들을 모두 합하면 70만부 가까운 판매부수를 자랑한다. 그는 직업적인 역사저술가의 생존모델을 만들었고 잘못된 역사관을 바꾸는 데 작은 힘을 보탰다는 생각이 들 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의 파워라이터]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그가 역사저술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우선 소설처럼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그의 ‘글쓰기’에 있다. 그는 정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야사에 상상력을 더해 역사의 빈칸을 채운다. 사실과 상상으로 짜여지는 그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흡입력이 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이 합방을 논의하기 위해 늦은 밤 일본 통감부의 외사국장 고마쓰를 찾아가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기록으로 남겨진 이들 간의 대화에 미세한 얼굴표정과 분위기를 상상해내 마치 소설처럼 읽혀진다. 역사서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 위험이 있지만 그의 상상력은 사실에 표정을 더할 뿐 이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는 “강의를 잘 하려고 주교재 외에 여러 자료를 준비하는 것처럼 나 혼자만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대화를 하려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철저한 자기관리도 그의 글쓰기의 자양이다. 남들이 봤을 때는 프리랜서이지만 그 스스로는 직장인 이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그는 “주변에서 자리관리를 못해 어느 순간 콘텐츠 부족이 드러나고 이 분야를 떠나는 사람을 많이 봤다”면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가끔 강연을 하는 패턴의 반복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하루에 저술에 쏟는 시간은 보통 5시간에서 6시간 정도이다. 책을 보는 시간도 그만큼이다. 그의 유일한 일탈(?)이라면 주변의 지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 카드 지출도 책값 아니면 술값으로 아주 단순하다고 한다.

그는 대중적인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지적했다. 쉽게 쓰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알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 대중적인 글쓰기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쉽게 쓴다고 독자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라면서 “대중들이 알고 싶었던 것,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풀지 못해 갈증이 있는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 대중적인 글쓰기”라고 말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인물 평전이다. 특히 당대의 주류사상과 기득권에 맞서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바꾸려 했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스러진 인물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는 시대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다 불우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애정이 간다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처럼 시대를 초월한 가치는 소외된 자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나온다고 말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윤휴와 침묵의 제국> 등은 이런 생각의 결과물이다. 패배한 사람만 다루지는 않았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처럼 승자의 이면을 들춰 그들의 허위의식과 함께 승자가 왜곡한 역사를 밝히기도 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사를 해석하는 그의 역사서는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 왕 네 명 중 한 명은 독살되었다고 주장한 <조선왕 독살사건>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쟁의 시각에서 살핀 <사도세자의 고백>이 대표적이다.

그가 다룬 다양한 인물과 주제들은 끊임없는 사료조사에서 발굴된다. 그는 “사료를 보면 저보고 나를 한 번 써달라고 요청하는 인물들이 엄청 많다”고 했다. ‘물음표’를 갖고 역사를 바라보면 자신과 같은 사람 백 명이 백 년이 걸려도 다 다루지 못할 만큼 많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조선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원교 이광사의 삶을 복원하는데 마음을 두고 있다. 그는 이광사에 대해 “당대에 추사 김정희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게 없다는 평을 받았던 서예가였는데 나주벽서사건 때 소론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됐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찾은 소재를 끝까지 천착해 스스로 미진한 점이 없을 때에야 글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의 주제로 책을 쓸 때는 연재 이외에는 다른 단행본 글쓰기는 하지 않는다. 흐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오지랖이 넓다’고 말한 그는 내년 3월부터 ‘글쓰기 강좌’도 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역사를 왜곡한다고 비판하는데 대학을 제외하고는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1차 사료를 배울 곳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전달하고 싶은 지식이 있고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고 가르칠 최소한의 공간이 있다면 그게 학교”라면서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을 벗어난 역사인식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이를 글로 써보고 싶은 학생들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책이나 강좌로 논어를 현대화하는 작업도 할 계획이다. 한 명의 역사학자가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아우르는 저술을 하면서 거기에 더해 고전까지 다루는 것에 대해 주변의 불편한 시각도 있음을 안다고 했다. 학문 울타리를 나누고 이를 침범하면 곱지않게 보는 학계의 폐쇄적 풍토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원래 우리 선비들에게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하나였다”면서 “우리 학계가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같은 지식인들의 학문공동체였던 ‘백탑파’의 통합적 학문정신을 추구할 때”라고 말했다.

이덕일의 주요 저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지금까지 34종 47권(개정판 포함)의 책을 출간했다. 첫 저작인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석필)는 당파가 조선 망국의 원인이었다는 식민사관을 부정하면서 균형과 견제를 통한 책임정치를 구현하던 당파가 당쟁을 거쳐 그보다 더 후퇴한 세도정치로 변질되는 과정을 통사적으로 고찰했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왕 독살사건 1·2>(2009·다산초당)이다. 1999년에 출간된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를 개정한 것으로 개정증보판에서는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사도세자의 후예들, 효명세자 등 다수의 인물이 독살되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두 권을 합쳐 모두 40만부가 팔렸다. ‘독살’이라는 코드로 왕권보다 강한 신권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사를 풀어낸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2011·역사의 아침)는 영조·정조실록 등의 사료에 나온 사도세자의 기록들을 찾아 사도세자의 죽음을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1998년 푸른역사에서 처음 나온 <사도세자의 고백>의 개정증보판이다. 총 5만부 이상 팔렸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2009·역사의 아침)은 명문가 출신으로 전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 이회영과 여섯 형제의 삶을 기록했다.

역사의 라이벌이었던 송시열과 윤휴도 다뤘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김영사)와 <윤휴와 침묵의 제국>(2011·다산초당)은 송시열과 서인들이 주장하는 북벌론이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구호에만 그쳤던 반면, 윤휴는 국제정세의 호기를 노려 실제적인 북벌을 준비했음을 보여준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5만여부가 팔려나갔다.



Today`s HOT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