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赤旗)는 노을에 나부낀다
시대의 변화란 영을 넘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길을 치달아 오르다가 문득, 영마루에 이르고 시야가 훤히 트이면서 새로운 정경이 눈 아래 전개되는 것과도 같다. 바로 몇 발짝 전의 그 순간과 생판 다른 세계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식민지에서의 해방은 바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하련(池河蓮)은 누구인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남아있는 작품도 단편소설 열 편이 못되는 여성작가를 거론하면서 해방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논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하련은 카프(KAPF)의 조직자요, 이론가였던 시인 임화의 아내였다. 지하련을 논하는 것은 임화를 얘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함께 말하지 않고는 일제말과 해방공간의 문학과 혁명을 얘기할 수 없다.
임화(林和, 본명 林仁植)는 1908년 서울 낙산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1921년 보성고보에 입학했는데 모친의 사망과 집안의 파산으로 학교 중퇴와 함께 가출, 독서에 몰입하면서 사회주의와 최신 예술사조를 섭렵했다. 그는 다다이즘의 시와 평문을 신문에 투고한 것을 계기로 시인 이상화, 소설가 윤기정, 평론가 박영희를 만나면서 1926년 12월 카프에 가담한다. 이상·박태원 등 구인회의 모던 보이들은 카프를 피해 다녔지만, 훨씬 뒤인 1934년 이상이 ‘오감도’를 처음 발표할 무렵 임화는 이미 아방가르드의 습작기를 벗어나 ‘단편 서사시’의 전형을 보여주고는 수많은 시편과 미술·영화·문학에 관한 평론을 발표하고 <조선신문학사론>을 집필하고 있었다.
임화는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보여 보성고보 동급생이던 김유영 감독의 영화 <유랑> <혼가>에 주연 배우로 출연했다. 이때 그는 조선의 ‘발렌티노’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서구형의 창백하고 조각 같은 미남자였다고 한다. 이 무렵 임화를 보살핀 것은 일곱 살 연상이며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박영희였고 훗날에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자 박헌영이었다. 김기진의 회상에 의하면 임화는 박영희의 어린 식객으로 방자하고 버릇이 없어 골칫거리였다. 그래도 박영희는 노잣돈을 마련하여 임화를 일본에 보내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임화는 카프 이론진의 두 기둥이었던 김기진과 박영희를 척결하고 지도부 세대교체를 하게 된다.
연극을 공부한다며 도쿄로 건너간 임화는 일본 나프(NAPF)의 성원이었고 카프의 일본지부를 맡았던 이북만과 합류한다. 그리고 이북만·김남천·안막·한재덕 등과 함께 잡지 ‘무산자’ 편집에 참가하면서 이북만의 여동생 이귀례와 ‘동지적 사랑’으로 결합한다. 이귀례는 ‘무산자’ 연극부의 히로인으로 나중에 영화에도 출연한 배우였다. 그들은 동거하면서 혜란이라는 딸까지 낳았고 1931년 귀국하여 혜화동에 살림을 차렸는데 이귀례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결혼식이란 형식적 허례에 불과하다. 우리는 남녀의 결합보다 동지와 동지의 굳은 악수로 맺어졌다.”
같은 해 임화는 소장파들과 더불어 카프의 볼셰비키화에 앞장서 문학운동이 아닌 계급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하면서 주도권을 잡는다. 제1차 카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32년 카프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제2차 카프 사건으로 대부분의 맹원들이 검거되었으나 전주로 호송되기 직전 서울역에서 각혈하고 졸도한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평양과 서울에서 요양을 하면서 투옥을 모면한다. 1935년 스물여덟의 임화는 평론가 김기진, 소설가 김남천 등과 함께 경기도 경찰부 동대문서 고등계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한다. 프롤레타리아 활동가의 신념을 갖고 있던 이귀례는 임화의 행동을 변절이라 규정짓고 이혼하기로 합의한다.
임화가 요양차 마산 결핵요양원으로 내려간 것이 카프를 해산한 그해 8월이었으며 여기서 그는 두 번째 아내 지하련과 운명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지하련의 본명은 이현욱(李現郁)이었고 아명은 이숙희(李淑姬)였다고 한다. 지하련은 1912년 거창의 천석지기 부호였던 이진욱과 첩실인 박옥련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이복형제들인 상만·상배·상조·상북·상선의 5형제와 언니 용희가 있었다.
큰오빠 이상만은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직된 군사주비단의 단원이었다. 셋째오빠 이상조는 신간회 동경지회에 가입하여 선전부에서 일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했다. 그는 마산과 경남 청년동맹원으로 ‘봉화’ ‘노동자’ ‘대구노동신문’을 작성하여 경남·전북 등지에 배포했다. 1932년에 대구에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과 출판물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넷째인 아우 이상북과 함께 복역했으며, 이때 스무 살의 이현욱도 함께 검거됐다. 대구에서 열린 ‘공산주의자협의회’에 대구고무공장 여공들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혐의였다. 두 오빠는 ‘공협’ 상부 조직자였다.
얼마 후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현욱은 대단한 미모와 애교있는 말솜씨로 조직 주변의 청년들을 사로잡았으나 “동지애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상실해버리니 그 점을 가장 경계해야 해요”라며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몇 해 뒤 아이 딸린 이혼남이자 결핵 환자인 카프 시인 임화와 전격 결혼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다. 1935년 마산 결핵요양원에 내려간 임화가 출옥한 이상조·상북 형제와 교제하면서 이현욱(지하련)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지하련의 큰오빠를 비롯한 집안의 반대에도 두 사람은 1936년 7월8일 혼인신고를 했고 4일 뒤에 아들 원배를 마산시 상남동 199번지에서 낳았다. 임화·지하련 부부는 서울로 올라가 살림을 차렸으나 임화를 간호하다 자신도 결핵에 감염된 지하련은 혼자 마산 산호리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글을 쓰게 된다. 산호리는 지하련에게 임화와의 첫 만남과 동거, 출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병 치료의 나날, 그리고 젊은 오빠들의 위장 전향과 은둔의 암담한 일상이 있던 곳이었다.
지하련은 1940년 12월 단편소설 ‘결별’이 임화의 동갑내기 평론가 백철에 의해 잡지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한다. 이때부터 이현욱은 소설가 지하련이 되었던 셈이다. 추천자 백철은 “지하련씨는 제 친우의 부인 되는 분으로 내가 기왕부터 경애하는 분입니다”라고 다소 파격적인 소개를 했다고 한다. 연이어 1942년까지 ‘체향초(滯鄕抄)’ ‘가을’ ‘산길’을 발표하고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도정(道程)’ ‘광나루’ 등을 발표한다.
한편 일제말 임화는 선배 동료 문인들과 함께 친일 행적을 남기고 있다. 1939년 이광수·박영희·이태준·김동환·최재서 등과 함께 황군작가위문단의 실행위원에 지명된 것과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에서 제작한 선전영화 <너와 나>의 대본을 직접 교정한 일이었다. 이는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강제징집하기 위해 만든 선전영화여서 뚜렷한 친일 행적이었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서른여덟 살의 임화는 김남천·이태준·이원조(이육사의 아우)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고 서기장이 되었으며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어 1946년 ‘인민적 기초 위에서의 민족문학’을 내놓고 ‘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를 선언하면서 남로당의 외곽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기획차장으로 지하에서 남로당 문예운동의 최고 이론가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