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만큼 한국인의 기질과 맞는 사업도 흔치 않다. 반도체는 실리콘웨이퍼에 전자회로를 입힌 뒤 손톱만 한 크기로 자르는 게 핵심 공정이다. 얼마나 칩 크기를 줄이느냐가 중요하다. 웨이퍼 1개당 더 많은 칩을 만들면 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칩 크기를 줄이려면 전자회로를 더 미세하게 웨이퍼에 입혀야 한다. 젓가락에 익숙한 한국인의 특성과 딱 들어맞는 작업이다.
삼성전자가 1993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처음 16메가 D램 반도체를 개발한 것은 한국 산업사의 족적 중 하나다. 일본의 코끼리표밥솥에 열광하고 소니의 워크맨이 세계를 풍미할 당시 한국이 첨단 IT 기술력에서 일본을 앞선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후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메가와 1기가 D램을 잇달아 내놓고 세계 반도체시장을 제패했다.
삼성은 반도체로 떼돈을 벌었다. 반도체 거품이 1998년 외환위기를 부른 주범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이런 면에서 아이러니다.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대표와 외채 협상을 마무리지은 정부의 고위 경제관료는 “반도체 거품을 보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고 실토했다. 그는 “반도체 호황의 그림자가 걷힌 뒤 한국경제의 우산 속을 들여다보니 속이 다 썩었더라”고 했다. 삼성은 당시 돈이 넘쳐흘렀다. 5단 광고가 유행할 당시 전면광고도 모자라 양면에 걸쳐 전면광고를 싣기 시작한 것도 관계사를 위한 지원책이었다는 게 정설로 돼 있다. 외환위기를 부른 것도 반도체지만 위기 탈출의 일등공신도 다름 아닌 반도체였다.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 한국인들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반도체를 축으로 한 수출산업이 위기에 빠진 한국호를 구했다.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일하다 퇴직한 이윤정씨(32)가 또 목숨을 잃었다.
그는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입사한 뒤 6년간 일했다. 삼성이 반도체로 한창 돈을 벌어들일 때다. 그는 테스트 라인에서 역겨운 냄새와 분진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씨는 퇴직한 지 7년 만에 갑자기 쓰러져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남편은 아이들을 친척집에 맡긴 채 병간호에 매달렸다. 병원비를 댈 수 없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험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법원에 호소했지만 재판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이씨는 숨을 거뒀다.
반도체공장의 암 발병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지도 5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공식 환자 통계조차 없다. 이 문제를 제기해온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신고된 피해자가 유일한 통계다. 반올림에 접수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사망자만 이씨를 포함해 모두 32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백혈병으로 숨졌다.
지금의 반도체공장 작업환경은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각종 암 질환으로 고통받는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근무환경이 열악했던 1990년 중반을 전후로 근무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 근무환경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지금 와서 입증하는 게 쉽지 않다. 산재 인정 범위를 좀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해 4월 서울행정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2명의 노동자를 산재로 인정했다. 근로복지공단도 이 판결이 나오자 뒤늦게 반도체공장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하면서 물꼬를 텄다.
산재 인정을 둘러싼 제도적인 문제는 정치권과 정부의 몫이라 쳐도 이해 당사자인 삼성은 어떤가. 삼성은 반도체로 매년 수조원의 이익을 내고 있다. 그 돈으로 임직원들이 보너스 잔치를 할 때 백혈병 환자들은 치료비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은 상상할 수 없다. 삼성은 반도체에서 번 돈으로 액정화면(LCD)과 휴대폰 사업을 일궜다. 과거 현대그룹이 건설에서 벌어들인 중동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자동차와 중공업, 전자를 키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현재 삼성의 태도는 삼성답지 않다.
삼성은 그동안 이 문제를 덮는 데 급급해왔다. 삼성은 미국 인바이런사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백혈병과 반도체공장 작업환경이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혀왔다.
이미 숨진 32명 외에 22명의 반도체공장 노동자가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삼성과 싸우고 있다. 이들은 “삼성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이나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심사 과정에 삼성이 앞장서 훼방을 놓고 있다는 얘기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백혈병의 실체를 인정하는 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이 백혈병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산재 포기의 대가가 아니라 정당한 위로금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7일 숨진 이윤정씨는 남편과 나눈 마지막 대화에서 삼성을 용서했다고 한다. 남편 정희수씨는 “지난해 10월경 그나마 의식이 있을 때 ‘다 혼내주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용서해주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제는 삼성이 이씨의 ‘용서’에 답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