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베트남전서 학살된 민간인, 그들의 죽음이 기억될 권리에 대하여

김종목 기자

▲학살, 그 이후
권헌익 지음·유강은 옮김 | 아카이브 | 327쪽 | 1만5000원

1968년 2월25일 오전 한국 군대가 베트남 하미 마을로 진군했다. 군대는 2시간 동안 135명의 주민을 죽였다. 죽은 사람 중에 총을 들고 싸울 만한 성인 남자는 3명이었다. 대부분 여자, 노인, 10대 소녀, 갓난아이, 어린이들이었다. 태아도 3명이었다. 같은 해 3월15일 미군은 미라이 마을에서 주민 수백명을 죽였다.

권헌익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교수는 1960년대 후반 베트남을 유린한 거대한 인간적 재앙의 한 부분을 주목했다. 그는 1999~2001년 여러 차례 이 마을들을 찾아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구했다. 장터와 학교, 가정과 국숫집에서 생존자들로부터 당시 투쟁과 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 생명 파괴의 지구적인 기원과 함께 집단 죽음, 친족·공동체의 추모에 관한 지역적 경험 등 학살의 유산을 탐구했다.

1968년 3월의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을 보도한 미국 클리블랜드의 ‘더 플레인 딜러’지 1면(1969년 11월 2일자).

1968년 3월의 미라이 마을 학살 사건을 보도한 미국 클리블랜드의 ‘더 플레인 딜러’지 1면(1969년 11월 2일자).

1968년 학살 직후 두 마을의 생존자들과 이웃마을의 친척들은 얕게 판 구덩이에 시신을 누이고 작은 돌멩이로 표시를 했다. 군인들은 불도저를 끌고와 그 얕은 무덤마저 짓밟았다. 베트남에서 낯선 장소에 얕게 묻히는 것이나 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한데 묻히는 집단 무덤의 매장은 비극적인 내세의 상태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를 ‘원통한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권 교수는 “국가 권력은 생명을 객관적인 사후세계로서 관리하는 데 입각해 세워진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인용하며 죽음에 관한 국가의 선별 행위를 분석한다. 1975년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은 기념비를 세우는 등 영웅적 전사자들을 숭배했다. 정치적으로 이들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었다.

비전투원 전사자들은 추모의 과정에서 빠졌다. 국가는 마을 조상을 모신 사당에 못질을 했다. 봉건·식민주의·부르주아 문화의 잔재에 맞선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 권 교수는 “마을 여자들과 아이들의 주검이 뒤엉켜 묻힌 아무 표지도 없는 무덤은 국민적 기억을 구성하는 이런 전후의 과정에서 바람직한 대상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가정의례에서도 ‘집단 죽음’의 추모는 어려웠다. 베트남에는 폭력적인 ‘길에서의 죽음’을 배제하는 전통이 있다. 게다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갈라진 사람들이 한데 묻혔다. 권 교수는 “집단 무덤은 ‘우리편’의 유해와 ‘상대편’의 유해가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는 모호한 대상이기도 했다”며 “양극적인 순수의 ‘생명정치’ 때문에 집단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려는 공동체의 시도가 특히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하미와 미라이 마을 사람들은 1990년대 들어서야 주변부로 밀려난 비공식적 전사자들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망자들의 장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집단 이장했다. ‘원통한 죽음’은 일부 지역에서 전쟁 영웅을 기리던 장소에도 들어왔다. “베트남의 전쟁 기념은 국가 독점에서 민간과 공동체 부문으로 옮겨”간 것이다. 개혁과 늘어난 자유 때문에 이런 ‘기억’의 작업이 가능해졌다.

[책과 삶]베트남전서 학살된 민간인, 그들의 죽음이 기억될 권리에 대하여

권 교수는 전쟁 기억에 관한 공적인 영역도 다룬다. 하미 마을의 경우 한국 군인들은 종종 식품과 건축 재료를 제공하며 난민촌에서 돌아온 주민들의 재정착을 도왔다. 군인과 주민들은 작은 선물도 주고받았다. 하미 생존자들은 학살이 벌어진 그날 외국인 청년들이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괴물로 변신한 걸 수수께끼로 여긴다.

권 교수는 ‘부대 교체’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학살의 군사적·국제정치학적인 맥락을 살핀다. 당시 남베트남의 동맹국이 점령하던 베트남 남부와 중부의 농촌 지역은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자 ‘무차별 발포 지대’로 변했다. 동맹국들은 산 사람이든, 물건이든 군사적으로 정당한 살상 목표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권 교수는 베트남전과 민간인 학살의 관계를 두고 “대량살상무기라는 기술 발달의 소산이자 ‘총력전’ 이론의 세계화가 낳은 결과였다”고 말한다. “ ‘모든 주민이 병사이고 모든 마을이 요새가 되는’ 상상 불가능한 이상을 상상한 전쟁”에서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지 않으면 적의 편에 선 것으로 간주한 지정학적인 제로섬 논리”도 학살의 한 이유였다.

권 교수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을 두고 “전쟁이라는 냉혹한 태엽장치에서 시계추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후의 삶을 통해 이런 잔인한 동요의 기억과 싸웠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일군의 한국 참전 군인들은 2000년 135인의 희생자 기념비를 하미 마을에 헌정했다.

권 교수는 책의 임무를 “학살로 죽은 망령들에게 다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베트남에서 조상을 기억함은 조상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권 교수는 집단학살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이상적인 장소로 그들의 조상으로 기억될 수 있는 집을 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곳은 희생자들의 정체성이 영웅적 덕목이나 계보적 가치의 크기를 기준으로 측정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역사의 지평에 존재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수용되는 집이어어야 한다. 또 그곳은 친족이 전통적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나서 모든 인간은 기억될 권리가 있다는 보편적 윤리와 화해를 이루는 장소여야 한다.”

<학살, 그 이후>는 2007년 이 책으로 ‘인류학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기어츠상을 받았다. 권 교수는 2009년 <Ghosts of war in Vietnam>(베트남전의 영혼)으로 조지 카힌 상을 받으며 ‘최고의 인류학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책은 작가의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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