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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된 뒤 막노동 전전…“어쩔 수 없이 치킨집이라도”

복직 기다리던 40대 신경원씨의 경우

신경원씨(40·가명)는 쌍용자동차 ‘렉스턴’ 제조라인에서 일했다. 완성차의 결함유무를 테스트하는 품질관리(QC)기사였다. 평택시 칠괴동의 쌍용차 공장을 지날 때면 아들은 운전하는 신씨의 옷을 당기며 말하곤 했다. “아빠, 저거 아빠회사 맞지?” 14년의 땀이 밴 곳이다. 신씨는 “아빠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내 작은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해고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2009년 4월 쌍용차가 2600여명의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하자 신씨와 동료들은 평택공장을 점거하며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옥쇄파업을 저지하려는 용역깡패들을 몸으로 막았다. 경찰헬기에 매달린 컨테이너박스에서 경찰특공대가 공장 옥상에 내렸을 때 그도 옥상에 있었다. 신씨는 “방망이와 방패로 맞고 있는 동료들을 보자마자 정신없이 도망갔다”고 말했다. 결국 노사는 마지막까지 반발한 정리해고 대상자 974명 중 52%는 희망퇴직 및 분사, 48%는 무급휴직하기로 합의했다. 무급휴직자 중 일부는 1년 후 바로 복직하고, 생산물량을 확보하는 즉시 무급휴직자부터 복직을 실시하기로 했다. 신씨는 무급휴직자,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동생은 희망퇴직자가 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지만 쌍용차에 복직된 이는 아무도 없다.

신씨는 복직을 기다리며 일자리를 찾았다. 평택시내 제조업체 십여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한 전자부품 업체는 채용인원이 10명이었지만 지원자 5명 중 유일한 쌍용차 출신인 신씨만 채용에서 탈락됐다.

경기 평택시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신경원씨가 주방 냉장고에서 튀김용 닭을 꺼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경기 평택시에서 치킨가게를 운영하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신경원씨가 주방 냉장고에서 튀김용 닭을 꺼내고 있다. | 김기남 기자

▲ “쓰겠다”는 회사 하나 없어
14년 익힌 기술도 힘 못써
“다시 회사 돌아가고 싶어”

신씨는 “중소기업에 취직하려고 해도 쌍용차 출신이라면 아예 배제한다. 정규직은 고사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도 어렵다”고 말했다.

동생도 중소제조업체 50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연락온 곳은 한두군데뿐이었다. 그마저도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력서에 적힌 ‘쌍용자동차 근무’라는 한 줄 때문이었다. 신씨는 “이제 동생은 이력서에 쌍용차 경력을 지우고 ‘자영업’이라고 적는다”고 말했다. 그는 “쌍용차 출신들이 들어가면 노동조합을 설립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라며 “열심히 일하다가 당한 해고다. 해고가 억울해 공장에 끝까지 남으려고 버틴 것뿐인데 다른 회사에선 우리를 전문 시위꾼처럼 여긴다”고 말했다. 14년간 익혀온 기술은 소용이 없었다. 쌍용차 경력을 숨겨도 나이가 많아 그를 쓰겠다는 회사가 없었다.

일을 하려면 아는 사람의 소개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신씨는 장의사인 지인의 가게에서 일하며 시신을 매장하거나 이장하는 일을 했다. 타일제조공장에 들어가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기관지가 좋지 않다. 공장에 날리는 석회가루 때문에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같은 렉스턴 라인에서 일하던 ‘살아남은’ 친구가 도시락 만드는 캐터링 업체를 소개시켜줘 5개월간 도시락 배달을 했다.

이후 신씨는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지난해 여름엔 신축빌라 건설현장에서 쓰러졌다. 빌라마다 1층부터 4층까지 오르내리며 하루에 문 50개씩 달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요령없이 힘으로만 하려다보니 탈진했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노가다’ 생활 1년에 허리도 다쳤다. 그는 “22번째로 죽은 그 청년도 해고된 후 나처럼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며 “쌍용차 사태 후 죽은 이들만 22명이다. 드러난 게 22명이지 해고자 모두가 죽고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막노동으로 번 돈은 일정치 않았다. 술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미용 기술이 있던 아내는 동네 미용실이 바쁜 날마다 나가서 일당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는 “동네에는 마누라가 집안을 먹여살린다고 소문이 났다. 남자가 변변한 직장이 없다보니 내 삶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음의 여유를 잃자 애들에게 손을 대는 일도 여러번 생겼다.

신씨는 취업을 포기했다. 스스로 가게를 차려 먹고사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해고당한 지 2년 뒤 갖고있던 돈과 은행 대출을 받아 조그만 치킨집을 차렸다. 그나마 기술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재 아내와 함께 낮 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쉴 새 없이 일한다. 문을 연 지 9개월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신씨는 “해고된 친구들은 대부분 이삿짐센터, 노가다, 대리기사가 많다. 4대보험을 떼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10명 중 1, 2명 정도”라며 “나처럼 자영업을 시작한 이들도 얼마못가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제 평택공장을 지나쳐도 두 아이는 더 이상 “아빠회사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신씨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치킨집하는 게 좋아? 회사 다니는 게 좋아?’라고 물어본다. 두 아이는 ‘치킨을 먹을 수 있으니까 치킨집이 좋다’고 답한다. 신씨는 “꼬마가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아는 것 같다”고 했다.

신씨에게 복직은 여전히 희망이고 꿈이다. 쫓겨나기엔 아직 젊은, 숙련된 기술자다. 복직하면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가는 게 꿈이다.

■ 특별취재팀 홍재원·김보미(산업부), 이재덕(경제부), 이혜인(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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