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서울대 녹두거리의 변신
골목상권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각종 패스트푸드뿐 아니라 빵, 커피 같은 서양음식은 물론 삼겹살집 같은 한식까지 전 업종에 걸쳐 프랜차이즈가 거리상권을 점령하고 있다. 프랜차이즈가 전성시대를 맞으면서 자영업자들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자리를 따내지 못하면 점차 경쟁력을 잃고 골목상권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경향신문 취재팀은 특정 거리를 집중 분석해 프랜차이즈 확산과 소비자의 소비패턴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다양한 지역을 검토한 결과 서울 대학동 녹두거리를 취재 대상으로 선정했다.
녹두거리는 서울대생들이 주로 찾는 서울 관악구의 한 지역이다. 좁게는 옛 신림9동(대학동)의 주점 골목, 넓게는 대학동 전체와 맞은편 옛 신림2동(서림동)까지를 녹두거리라 부른다. 취재팀이 이 지역을 분석대상으로 꼽은 이유는 녹두거리가 서울대 학생회의 ‘문화거리 가꾸기’ 활동 등으로 1990년대까지 ‘프랜차이즈 금지 구역’과도 다름없었던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국내 시장에 집중적으로 들어서던 1990년대에도 전통 주점 위주로 상권을 형성한 ‘화석’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과거 주점, 호프집 등이 주업종이었던 서울대 앞 녹두거리는 최근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롯데리아 등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점들로 뒤덮였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 자취하는 지방학생 줄면서
상권도 인근 전철역에 밀려
거리 전통에 큰 의미 안 둬
하지만 취재팀이 최근 4차례 방문한 녹두거리는 이미 프랜차이즈로 뒤덮여 있었다. 지난 6월 처음 찾은 서울 대학동의 커피숍 카페베네 매장엔 학생 손님들이 북적댔다. 오후 6시. 80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매장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문을 하려는 학생들은 줄을 섰다. 시쳇말로 ‘30초당 1만원’으로 통칭되는 대박 프랜차이즈였다.
시험기간이어서인지 서울대 재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 상당수가 노트북이나 책을 테이블 위에 펴놓고 과제물 작성 및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페베네 옆 오래된 한 서점에는 커다란 독서 테이블이 마련돼 있었지만 앉아 있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카페베네에서 만난 한 서울대 학생(여)은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즐겨 찾는 편”이라면서 “쾌적한 환경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제법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오후 5시, 다시 찾은 녹두거리 ‘메인 스트리트’에서 오랜 기간 영업을 해온 ‘행운분식’에 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반면 방학인데도 부근의 일부 프랜차이즈 음식점에는 학생 손님들이 여러 팀 보였다.
젊은 소비자들은 골목별로 자리잡은 동네 상점보다 쾌적하고 맛이 일정한 프랜차이즈 상점을 선호한다. 서울대 06학번인 김륜용씨(26)는 “프랜차이즈는 음식이 깔끔하고 관리가 잘돼 청결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10학번 최모씨(22·여)는 “프랜차이즈는 깨끗해서 좋다”며 “서점만 봐도 교보문고 같은 곳은 크고 깨끗하고 정리가 잘돼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유행에 민감한 대학생들에게 정돈되고 규격화된 프랜차이즈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신입생인 송모씨(19·여)는 “가격이 비싼 게 흠이지만 친구들끼리 다 같이 가는 분위기여서 함께 가는 편”이라고 했다.
1990년부터 서점 ‘그날이 오면’을 운영해온 김동운 대표는 요즘 젊은층의 생활패턴을 ‘혼자 놀기’와 ‘도시화’ 등으로 요약했다. 김 대표는 “학내 동아리나 학생회 같은 학생 자치활동이 약화되면서 동료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 자체가 사라졌다”며 “요즘 젊은층은 시간이 나면 혼자 커피를 마시거나 조용히 게임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서울대에) 지방 출신 학생들이 줄어든 반면 서울 강남지역 출신들이 늘어나면서 자취촌인 녹두거리 대신 서울대입구역 등 강남과 가까운 전철역 인근이 더 번성하고 있다”며 “깨끗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이 지역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젊은층이 ‘구닥다리’ 같은 옛 문화에 대한 애착 대신 잘 정돈된 도시적 편리함에 기대면서 상권도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수 재학생들도 더 이상 녹두거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유승환씨(27·경제학과 석사과정)는 “녹두거리는 술값이 싸 주로 개강과 종강을 즈음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가는 곳일 뿐”이라고 했다.
대신 서울대 학생들은 사교 모임을 위해 서울대입구역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다.
서울대입구역은 지상 15층, 지하 7층짜리 복합 쇼핑몰인 에그 옐로우 등 깨끗한 고층건물이 속속 올라갔다. 던킨도너츠 등 프랜차이즈와 패밀리레스토랑이 마련돼 있다. 서울대 정문 방향인 3번 출구로 나오면 파리바게뜨와 스타벅스, 불고기브라더스 등이 들어서 있다.
대학 시절 서울대입구역에서 자취를 했던 김태우씨(37·경영 95)는 “1990년대 서울대입구역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이 있는 곳 정도의 의미를 지녔을 뿐”이라며 “당시 모든 만남은 녹두거리에서 이뤄졌는데, 요즘 젊은층의 소비 패턴과 대학 주변 상권이 크게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