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긴 1초가 있을까. 어느 누가 봐도 오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판정이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조차도 신아람(26·계룡시청)의 편이었다.
30일 영국 엑셀 런던 사우스 아레나에서 벌어진 여자 에페 개인전 준결승. 대회 11번 시드를 받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아람은 세계 랭킹 5위, 3위를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올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을 맞아 선전했으나 결승 문턱에서 오심 때문에 메달을 도둑맞았다.
신아람과 하이데만은 신중하게 검 끝을 교환하며 5-5로 팽팽히 맞섰으나 주어진 정규시간 내에 승부를 가리는데 실패해 연장 승부에 돌입했다. 연장은 1분내에 먼저 팡트(찌르기) 득점에 성공하면 끝나는 서든데스였기 때문에 둘은 무려 8차례나 동시 득점 포인트를 주고받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경기 종료 1초 전까지 상대 공격을 잘 막아낸 신아람은 연장전을 무승부로 끝낼 경우, 경기 전 무작위 추첨으로 주어지는 프라이어리티(Priority·우선권)에 의해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1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하이데만이 공세에 나서 신아람을 코너로 몰아넣은 상황에서는 1초는 마치 1시간 같았다. 신아람은 두차례 상대 공격을 맞받아치면서 잘 막았으나 여전히 1초가 남았다. 게다가 세번째 공격을 막았을 때는 시간 오작동을 이유로 0초로 줄어든 시간을 다시 1초로 돌려놨다. 결국 4번째 공격 기회를 얻은 하이데만의 마지막 팡트를 막지 못했다. 금메달을 딸 기회를 놓치고 만 신아람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의미로 1시간이 넘게 피스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AFP통신은 이 장면을 ‘신아람이 흘린 통한의 눈물’로 소개하며 올림픽에서 일어난 주요 판정 시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왜 1초에서 멈췄나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1초 동안에 어떻게 3∼4차례 공격이 가능했는지다. 1초 이내의 전광판에 표시되지 않는 시간을 감안해 2초에 가까운 시간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스텝이 동반되는 펜싱의 찌르기 동작이 두차례 이상 나온다는건 무리다. 신아람을 지도한 심재성 펜싱 대표팀 코치는 “한두번은 이해한다. 그런데 10초가 남은 것도 아니고 3∼4번 공격이 이어졌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타임키퍼가 고의든 아니든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펜싱 룰에서 1초 안에 벌어진 공격이 무효가 돼 심판이 알트(멈춰)를 선언하더라도 시간을 다시 1초로 되돌리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이해하기 힘든 판정이다.
또 세번째 신아람과 하이데만의 유효 공격이 동시에 주고 받았을 때는 0초가 된 시간이 다시 1초가 되는 해프닝까지 겹치며 판정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심판진은 동작이 끝난 상황에서 시간이 흘렸다고 설명했다.
하이데만의 마지막 공격도 오심 의혹을 지울 수 없다. 하이데만은 신아람의 칼을 한번 치는 동작이 나온 뒤 팡트로 이어졌는데 1초의 시간 동안 그런 공격이 불가능하다는게 펜싱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한 펜싱협회 관계자는 “4번째 공격은 누가 봐도 1초를 넘긴 공격이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지에서 중계한 오경석 KBS 펜싱 해설위원은 “TV화면 1초는 30개의 프레임으로 이뤄지는데 마지막 동작만 47프레임이 나왔다”면서 판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왜 판정 번복은 없었나
현장에서 경기를 본 한국 펜싱 선수단을 비롯해 전 세계 취재진들과 팬들은 물론이고, 국제펜싱연맹(FIE) 관계자 조차도 판정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신아람에게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FIE는 경기 뒤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국의 어필을 정식 절차에 의해 받아들였지만 오심 논란에서 벗어나고픈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한국 벤치가 6명으로 구성된 테크니컬 디렉터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 의사를 전달한 뒤 약 30분 동안이나 결정을 내리지 못한채 우왕좌왕했다. 곧바로 정정이 되지 않았을 때 판정 번복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예상대로 결국 돌아온 대답은 “경기 종료는 경기장 시간을 보고 판단하는 심판의 결정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곧바로 한국은 이날 경기장을 찾은 박용성 대한체육회 회장까지 나서 테크니컬 디렉터에게 서면으로 이의신청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데만의 마지막 공격이 1초 안에 이뤄진 것이 맞는지 비디오 판독 요청까지 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펜싱 국제대회에서 항의는 테크니컬 디렉터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돼 있다. 경기중 심판들의 판정을 감독하는 운영위원회 또는 심판위원회인 셈이다. 그러나 이날 명확한 오심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가 없었다는 점도 유럽세가 강한 펜싱의 텃세가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심 코치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테크니컬 디렉터들이 내게 와서는 ‘억울함을 이해한다’고 해놓고는 결정은 심판 판정을 뒤집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면서 “지금으로서는 더 항의할 수 있는 절차도 없었고, 선수가 3·4위전도 뛰어야 하는 상황에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며 제자의 지난 4년간의 노력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고개를 숙였다.
■‘악법도 법’?
일단 한국 선수단은 더 이상의 항소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영 박태환의 경우처럼 특정국가 심판의 오심으로 잘못 알려지는 것이나 편파판정 등으로 논란이 커지는 것도 부담스럽고, 앞으로 경기가 계속 남아있는 상황에서 논란의 불씨를 남겨두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아울러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에서 이런 케이스가 거의 없어 이에 대한 논의는 이뤄질 수 있지만 판정 번복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박용성 회장은 “악법도 법이다. 이번 문제는 룰에 따라 심판진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설명을 들은 만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법을 넘어설 수 없지 않은가”라며 “선수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국민들에게 죄송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며 안타까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