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 외 지음 | 공감의기쁨 | 256쪽 | 1만3000원
“어머니는 내 시의 시작이자 끝이다. 지금도 나는 가난한 부뚜막에 놓여 있던 어머니의 낡은 시작노트를 잊지 못한다”(정호승). “열일고여덟 살 무렵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던 나름대로 ‘잘난’ 문학소년이었다”(안도현).
짧은 순간일지라도 20대에 시와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별 하나, 가을 바람 한 점에도 들뜨고,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듯 불면으로 밤을 뒤척여본 적이 있는가. 책은 중견 시인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그리고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문학청년 시절 체험한 시와의 연애담을 묶었다. 그들이 어떤 시에 빠졌고, 어떤 시인에게 끌렸는지 엿볼 수 있다.
![[책과 삶]시인들, ‘흑백영화’처럼 시와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추억하다](https://img.khan.co.kr/news/2012/08/17/l_2012081801002072400168681.jpg)
정호승은 어머니 못잖게 대구역 노천대합실이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줬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대구역을 자주 찾아 노천대합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고 한다.
또 여고생과의 풋사랑이 시작된 곳도 그곳이다. 대구역 노천대합실은 정호승에게 문학의 밑거름이 된 공간이다. 정호승 시 가운데 기차역에 관한 대목이 있다면 눈여겨봄직하다.
안도현은 황동규 시인을 묘사에 관한 한 영원한 문학청년이라 일컫고, 김남주만큼 철저한 언어의 승부사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문학청년이라 자칭하는 사람이 시를 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안도현은 열일곱살 때 박용래의 시 ‘구절초’를 읽었다. 그는 구절초가 어떤 꽃인지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서야 구절초를 처음 만났는데 구절초를 처음 본 날 참회의 시를 썼다고 한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이 들길을 여태 걸어왔다니/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그는 이 시에 ‘무식한 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시는 시를 낳게 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장석남에게 스무살은 난감하고 비감에 찬 날의 연속이다.
그는 스무살 어느 겨울날 한국일보 한 귀퉁이에서 김종삼 시인의 부음을 접했다. 김종삼을 잘 알지 못했지만 부음을 본 순간 답답함과 우울함이 엄습해왔다고 한다.
‘한 시인이 죽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장석남은 그날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김종삼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상황을 그린 황동규의 시 ‘점박이 눈’은 장석남에겐 아주 특별한 시다.
시인과 시인의 우정에 얽힌 일화들은 애잔하다. 5공화국 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 박정만 시인과 대학 선후배 관계인 하응백, 정호승의 추억담이 특히 그렇다.
시와 더불어 1970~80년대를 건너온 저자들의 모습은 슬픈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하다. 가난하고 여렸던 20대, 시와의 열애는 저자들을 울리기도 했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치기어린 첫사랑을 떠올려 보면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