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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처한 대중은 이성 잃은 야수로 변한다는 통념을 뒤집다

입력 2012.09.14 21:10

수정 2012.09.1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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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를 응시하라 레베카 솔닛 지음·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512쪽 | 2만원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통념은 이렇다. 우왕좌왕하며 제 살기에 급급하다. 폭도로 변하기 일쑤며 약탈도 서슴지 않는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의 상태, 야만의 상태다. 할리우드 영화는 군중을 이성을 상실한 야수로 묘사하며 이런 통념을 증폭시킨다. 재난에 관한 통념이나 재난 영화의 묘사는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아비규환의 순간은 죽음과 상실을 가져오고, 사람들을 정신적 충격에 빠뜨린다. 하지만 재난 때 행동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이타적이다. 슬픔과 함께 기쁨의 순간도 찾아오며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도 생겨난다. 책은 끔찍하고 비극적이며 슬픈 재난 속에서 나타나는 긍정의 효과와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1906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는 이타주의와 연대의 ‘샌프란시스코 정신’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즉흥적으로 구조활동을 벌이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한 중년 여성은 화덕을 만들어 요리한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오페라단의 여성 단원은 생후 4개월짜리 아기를 보살피고 우유를 구해 먹였다. 배관공 노조는 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책과 삶]재난에 처한  대중은 이성 잃은 야수로 변한다는 통념을 뒤집다

저자는 이 평정과 연대를 두고 ‘재난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스코로 달려온 구호팀은 어느 급식소에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는 문구를 썼다. “끔찍한 순간 아주 짧게 등장하는” ‘재난 유토피아’의 역설적 의미를 잘 설명한 문구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놀라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천국의 가능성은 이미 초기 설정값으로 우리 안에 있다.” 원제는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이다. 저자는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라고 부연한다.

이 낙원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견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런던 공습시기에도 영국인들은 침착성을 보여줬다. 1917년 12월6일 캐나다 핼리팩스 항구의 무기수송선 폭발 때도 자원자들이 부상자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온종일 일했다.

경찰특공대들이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 컨벤션센터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무법 상태 근절을 내세웠다. AP연합뉴스

경찰특공대들이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 컨벤션센터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무법 상태 근절을 내세웠다. AP연합뉴스

공황과 자연상태를 조장하는 약탈자와 야수들은 따로 있다. 정부와 군대, 기업 같은 정치경제 권력과 엘리트들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이들은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약탈자로 몰아 죽였다. 사람을 구하려고 폐허 더미를 뒤지던 이가 폭도로 오인돼 총에 맞아 죽었다. 은행 지배인도 금고 문을 열다 사살되었다. 1985년 멕시코시티 지진 때 정부는 무너진 산부인과 병원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그 폐허에서 영아 8명이 구조됐다. 대학생들은 생존자 수색을 위해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여야 했다. 저자는 1923년 9월1일 관동 대지진 때 6000명의 조선인과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자경단원들에게 살해된 사건도 거론한다.

이런 폭력은 2000년대까지 이어진다. 2005년 8월29일 미국 뉴올리언스를 초토화한 건 허리케인 카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당국의 목적은 구호가 아니라 통제였다. 2000명의 주민들이 통제에 따라 스포츠경기장 슈퍼돔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은 거대한 감옥이었다. 정부 당국은 “시민들이 너무 위험해 침수되고 오염된 도시에서 대피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안전 지역으로 갈 수 있는 다리마저 통제했다. 가난한 흑인들이 강간, 살인, 약탈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퍼져갔다. 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보도하며 사태를 증폭시켰다. 플랑코 주지사는 깡패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필요하면 기꺼이 총살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중무장한 군인과 경찰은 언제라도 발포할 태세였다.

살인과 약탈, 흑인깡패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거짓으로 판명됐다. 슈퍼돔에 시신이 200구가량 있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여섯 구였다. 대부분 자살이나 자연사였다. 총질을 한 것은 ‘깡패’가 아니라 군인, 경찰, 용병에다 총기와 인종주의로 중무장한 백인 집단이었다. 이들의 범죄 행위는 수사 대상이 아니었다. 허리케인이 발생한 지 16개월이 지나서야 경찰 7명이 살인과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됐을 뿐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자원자들이 도시 고속도로 홍수로 차량 지붕에 매달려 떠내려온 흑인 가족을 구하고 있는 모습. 그러나 정부 당국은 통제 목적으로 자원자들의 구호 활동을 막았다.AP연합뉴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자원자들이 도시 고속도로 홍수로 차량 지붕에 매달려 떠내려온 흑인 가족을 구하고 있는 모습. 그러나 정부 당국은 통제 목적으로 자원자들의 구호 활동을 막았다.AP연합뉴스

왜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대중을 적으로 간주하여 통제하기로 했을까? 저자의 의문이다. 엘리트들은 재난에 관한 ‘근거 없는 통념’을 근거로 대중을 위험한 존재로 상상하며 오히려 대중을 위험에 빠뜨린다. 바로 ‘엘리트 패닉’이라 부르는 것이다. 권력과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타심과 연대, 상호부조와 자원자들의 노력이 빚어낸 참여민주주의 순간이자 ‘자결(自決)의 무정부 상태’다. 저자는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참여한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지진, 태풍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경기침체도 거대한 재난으로 규정한다. 이 재난도 관용, 이타주의, 연대, 참여 같은 가치를 실현하고, 분권화와 민주화를 이룰 기회다. 시민을 개인적 만족에 집착하는 파편화된 소비자로 만드는 경제의 사유화, 사회의 사유화를 깨뜨리는 일도 ‘재난 유토피아’의 경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본다. 노동 탄압과 빈부 격차 확대라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OECD 자살률 1위의 사회적 죽음이 직면한 한국 사회에서도 ‘재난 유토피아’ ‘지옥 속에 세워진 낙원’의 가치는 유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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