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에 나타난 ‘강탈’
정수장학회가 갖고 있는 MBC와 부산일보 주식이 ‘강탈’당했다는 사실은 법원에서도 인정됐다. 고 김지태씨 유족이 정수장학회 등을 상대로 낸 주식반환 소송을 맡은 1심 법원은 ‘국가가 강압적으로 주식을 증여받았다’고 했다. 정수장학회가 주식을 돌려줄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이는 법적으로 돌려달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염원섭 부장판사)는 지난 2월 판결문을 통해 수차례 “김지태씨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을 (정수장학회에) 증여하게 된 것이 인정된다”고 확인했다.
국가의 강압을 인정한 근거는 재판부가 판단 토대로 삼은 ‘기초사실’ 관계에 담겨 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을 보면, 5·16쿠데타 직후 수립된 군사혁명정부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분으로 부정축재처리요강을 발표했다. 대대적인 기업인 수사가 뒤따랐다. 중앙정보부(중정) 부산지부 역시 1962년 3~4월 김지태씨가 세운 부일장학회 간부와 김씨가 운영하던 회사 임직원, 김씨 부인을 줄줄이 구속했다.
재판부는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협박성 발언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회사 임직원들이 연행된 직후 중정 부산지부장 박모씨가 군 야전복 차림에 권총을 차고 와 “우리 군이 목숨 걸고 혁명을 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재산은 우리 것이다”라며 겁을 줬다는 것을 사실로 봤다. 부산지부 수사과장 김모씨가 김씨 측근에게 “살고 싶으면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요구한 점도 사실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김씨 역시 구속됐다가 재산을 기부한 후에야 풀려났다는 것을 주요 사실로 인정했다.
당시 일본에 머물던 김씨는 측근들과 부인의 구속 소식을 전해듣고 귀국해 역시 관세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김씨는 결국 군 검찰에서 징역 7년을 구형하자 다음날 당시 최고회의 의장 법률고문이었던 신직수씨에게 문화방송과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주식 포기각서를 써 줬다. 재판부는 김씨가 이어 고원증 당시 법무부 장관이 제시한 기부승낙서에 날인했다는 부분도 사실로 인정했다. 기부승낙서 날인 직후 김씨 가족과 관련자 모두가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됐다.
재판부는 “국가가 강제로 김씨가 소유한 언론 3사 주식을 증여받았다”는 취지의 국정원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의 보고서도 언급했다. 이어 “앞서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과거 군사 정부에 의해 자행된 강압적인 위법행위로 김씨가 주식을 증여하게 된 점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정부의 강압을 인정하더라도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기한은 지났다고 봐 결국 유족들의 패소를 선고했다. 강압은 있었지만 증여계약 자체를 무효로 할 수 있을 정도로 극심하지는 않았다고 봤다. 무효가 안될 경우 취소를 해야 하는데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인 제척기간 10년을 이미 지난 것으로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은 오는 24일 처음 열린다. 항소심에서도 김씨가 받은 ‘강압의 정도’와 제척기간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