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원로의 아들로 지방서 25년 근무…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
중국인 13억여명 가운데 최고의 1인 자리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59)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지닌 정치인이다. 혁명 원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질곡의 청년 시절을 보냈고 지방에서 25년을 근무했다. 온화한 미소 속에는 덕을 중시하는 인품이 담겨 있지만 10번이나 거절당했지만 끝내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서 보듯 강한 집념의 소유자이며, 날카로운 공산주의 이론가란 평가도 따라붙는다.
시진핑은 1953년 6월 시중쉰(習仲勳·1913~2002) 전 부총리의 두 번째 부인 아들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廣東)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이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숙청당했고 당에서 축출당한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5살 때인 1958년 아버지, 형과 함께한 시진핑(가운데).
▲ 지방 전전 질곡의 청년기 보내
1979년 대학 졸업 후 정계진출
저장성 서기 시절 괄목할 업적
행동 중시하고 현장 시찰 즐겨
시진핑은 부친이 근무하는 중난하이에 자주 놀러갔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수수(叔叔·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태자당 계열로 분류되는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 등과 어릴 적부터 교류했다. 시진핑의 고난은 1962년 부친이 권력투쟁에 밀려 실각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까지 몰아치면서 시작됐다.
1969년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하방됐으며 처음에는 불과 3개월을 못 버티고 탈출했다. 체격은 우람했지만 농사짓는 솜씨는 시골 아주머니에 미치지 못했다. 백부와 백모의 설득으로 다시 량자허로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시진핑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고 1974년에는 량자허의 촌장이 됐다. 시 부주석은 2003년 자신이 쓴 회고문에서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드렸고 당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75년 칭화대에 입학할 수 있는 2명이 옌안에 할당됐고 시진핑에게 한 자리가 돌아가면서 그는 7년간에 걸친 하방생활을 접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에게 비로소 학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부친의 연금생활도 13년 만에 끝나 부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980년대 초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1979년 여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돼 당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그는 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하고 1982년 3월 베이징에서 300㎞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의 당위원회 부서기로 부임했다. 현의 3인자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 간부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부친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수파 겅뱌오가 실각하기 전에 아들을 빼내야 한다는 부친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했다.
유명 가수 출신의 부인 펑리위안.
시진핑은 1985년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17년간 푸젠성에서 일하면서 당서기까지 지냈다. 푸젠성에서의 시간은 그가 정치적 기술을 연마한 시기다. 샤먼시 부시장 재직 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시진핑은 자신의 뒤를 봐주던 샹난(項南) 푸젠성 서기가 실각하면서 1988년 5월 푸젠성 닝더(寧德)지구 서기에 임명됐다. 닝더는 푸젠성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고 그로서는 정치적 좌절이기도 했다. 당시 푸젠성의 한 관리는 홍콩 언론에 “당시 시진핑에게 태자당의 인맥을 활용해 도시를 업그레이드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며 “대신 시진핑은 푸른 산과 강을 인민들에게 돌려주자는 환경운동을 전개했다”고 말했다. 당시 부유층, 권력층이 조성한 큰 묘지들이 시진핑의 눈에는 거슬렸다고 한다. 지도자들이 승진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업적만 생각하던 시기에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대 그의 밑에서 일했던 한 관리는 “표면적으로 시진핑은 안전을 추구하는 평범한 지도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매우 야심찬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한때 푸른색 군복과 낡은 옷으로 검소함을 드러내던 시진핑은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로 일하면서 양복을 입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등 해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외부 인사들을 많이 만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2002년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浙江)성으로 자리를 옮겨 2007년 초까지 재직했다. 당시 31개 중국 성·직할시·자치구 당서기 가운데 최연소급이었다. 그는 골수 현장주의자여서 저장성 서기 시절 동안 1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냈다. 2006년 8월에는 하루에 315명으로부터 진정을 받은 일도 있다. 저장성 서기 재임 당시 성의 국내총생산(GDP·1조5600억위안)이 상하이시(1조300억위안)를 능가하는 성취를 일궈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리청 연구원은 “민간 기업을 발전시키는 데 시진핑이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줬으며 이는 그가 개방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한다”고 평가했다.
시진핑(오른쪽)이 저장성 서기 시절인 2003년 4월 위허진의 가물치 단지를 시찰하고 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시찰을 즐겨 했다.
시진핑은 2007년 3월 돌연 상하이시 서기로 옮겼는데, 부패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다. 천량위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후진타오(胡錦濤)의 후계자로 고려한 인물이다. 상하이방의 본거지에 그가 입성한 것은 장쩌민이 포스트 후진타오로 시진핑을 지목한 것을 의미했다. 시진핑은 말보다는 행동을 중시하고, 농촌이나 공장 등 현장 시찰을 즐겨했지만 상하이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일부 상하이 유력 인사들이 “그의 언동에는 생기가 없고, 특징도 없고, 강직함도 없었지만 실수도 없었다”고 혹평한 것도 이 같은 처신 때문이다. 상하이에 부임한 그를 위해 부하 관리들은 영국식 호화주택을 사택으로 준비했으나 시진핑은 “당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쓰라”며 곧바로 떠나버렸다. 혹자는 자신에게 쳐진 덫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진핑은 또 미국의 건축회사인 젠슬러가 상하이의 랜드마크 건물을 지으려는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상하이의 아이콘이 될 건물이라면 중국 기업이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전임 천량위 서기가 중앙정부와의 불화로 낙마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 “상하이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상하이에서 나온 새로운 물결소리를 환영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평가했다.
상하이시 서기로 7개월 재직한 그는 마침내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미는 리커창(李克强)을 밀어내고 차기 지도자를 예약하기에 이른다. 그의 인생 역정에서 보듯 시진핑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출세한 정치인은 아니다. 1997년 10월에 열린 15차 당 대회에서 장쩌민이 포함된 최고 간부들 사이에서 후진타오 후임을 논의하면서 시진핑은 리커창과 함께 후보로 일찌감치 떠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10월 상무위원이 된 시진핑.
시진핑이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입지를 굳혀 갔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시진핑의 위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더욱 강화됐다”고 말한다. 이는 중앙에서 그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한 첫 케이스로 꼽힌다. 올림픽 준비는 외교뿐 아니라 국내 안보, 병참, 운송, 미디어 관리, 환경보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작업이고 인민해방군, 경찰, 당, 정부, 지방관료들 사이에서 조정 역할을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올림픽을 기회로 삼아 티베트의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됐고 신장의 이슬람 분리주의자들도 동태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2010년 10월18일 톈안먼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있는 베이징의 징시빈관(京西賓館). 시진핑은 17기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 폐막일인 이날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그가 군권 장악을 위한 중대한 관문을 넘었음과 동시에 사실상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됨을 확정짓는 날이었다. 시진핑은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시진핑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정치인이란 평가가 적지 않으나 이는 생존술이었을 수도 있다. 예상보다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란 전망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