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억달러 가산 ‘부정축재’ 의혹… 국민가수인 부인도 ‘족쇄’로
시진핑(習近平·59) 중국 국가부주석의 형제들도 시 부주석처럼 부친의 실각과 문화대혁명 등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시 부주석이 지도자 자리를 예약한 후 각종 이권 개입과 특혜로 재산을 불려 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가족 문제는 앞으로 10년간 중국을 이끌 시 부주석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중국의 국보급 가수로 스타급 퍼스트레이디의 등장이 기대되지만 보수적인 중국의 정치풍토상 시 부주석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중국 선전당국은 펑리위안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해 갈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진핑 부주석 직계 가족. 시 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 어머니 치신, 딸 시밍쩌, 아버지 시중쉰(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 형제들 국영사업 수주·이권 개입 논란
부인의 ‘서방스타일’ 역효과 될 수도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시 부주석의 이복형 시정닝(習正寧)은 하이난(海南)성 사법청장을 역임했으며, 199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큰누나 시허핑(習和平)은 30세가 되기 전 요절했으며, 시 부주석은 누나의 죽음에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복누나 시첸핑(習乾平)은 생존해 있다.
시중쉰의 두 번째 부인이자 시 부주석의 모친인 치신(齊心)은 공산당과 팔로군 여전사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시 부주석의 친누나 두 명의 이름은 각각 치차오차오(齊橋橋), 치안안(齊安安)이다. 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성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블룸버그통신은 시 부주석 일가의 자산 총액이 4억달러(약 4600억원)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자산은 대부분 치차오차오(齊橋橋)와 그의 남편 덩자구이(鄧家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치차오차오가 전략 물자인 희토류 업체의 지분을 18% 보유하고 있다는 파이낸셜타임스 보도도 있었다. 치안안은 중국외교학원을 졸업했으며, 캐나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남편 우룽(吳龍)은 뉴포스트콤이라는 회사의 대표로 있으면서 2007년 이후 국영기업이 발주한 이동통신 관련 용역 및 자재 납품을 다수 수주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시 부주석의 2살 아래 남동생인 시위안핑(習遠平)은 시 부주석처럼 문화대혁명 등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 부주석도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위안핑은 인민해방군에 복무했으며 무역회사, 정부기관에도 근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의 일부 전기 작가들은 그가 형의 권세에 기대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밝힌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시위안핑은 1997년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홍콩으로 이주했다.
중국 공산당이 공표한 이력에는 시 부주석의 초혼 사항이 기재돼 있지 않으나 첫 부인은 주영 중국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커화(柯華)의 딸이다. 결혼 3년 만에 이혼했으며 부인이 시 부주석의 지방 생활을 힘들어 한 것이 헤어진 이유로 알려져 있다.
시 부주석이 펑리위안을 만난 것은 1986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시절이다. 시 부주석이 베이징으로 올라와 만났다는 설과 샤먼에 있는 펑리위안의 친구 집에서 만났다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펑리위안은 스타급 가수였고 시 부주석은 첫 만남에서 “성악 창법에는 어떤 종류가 있느냐”며 펑리위안의 전공에 깊은 관심을 보여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1987년 9월 결혼했지만 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둘이 워낙 바빠 떨어져 있을 때가 더 많았고 춘제(春節·중국 설날) 때도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993년 태어난 딸 시밍쩌(習明澤)가 있으며, 현재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다. 시 부주석은 푸젠성에서 일할 때 방송 진행자와 밀접한 관계라는 소문도 돌았다.
펑리위안은 1962년 산둥성에서 3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현의 문화관장을 지냈고 모친은 극단 단원이었다. 지난해 중국 잡지 환구인물은 펑리위안 특집 기사에서 “그가 어린 시절 극단 마차를 타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먹다 굶다 하는 등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7년 학생 모집을 재개한 산둥성의 5·7예술학교에 합격해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으며, 중국음악학원에서 유명한 민속 성악가의 지도를 받았다. 1982년 CCTV 춘제 경축 공연에 출연하면서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2002년 군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남편이 사실상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2007년부터는 공익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9년 부친을 잃었으며, 모친은 베이징에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펑리위안이 서방 스타일의 첫 퍼스트레이디로 개방적이며 현대화된 중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자칫 그의 존재에 시 부주석이 가리는 역효과를 중국 당국이 우려한다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