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 채무자는 안 되는 등 조건 까다로워 신청자 거의 없어
무리한 주택담보대출로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하우스푸어(집 가진 가난한 사람)를 위해 각 은행이 대책을 내놓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금융당국이 나서 금융권 전체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지만 당국은 ‘아직은 하우스푸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며 오히려 발을 빼고 있다.
■ 진짜 하우스푸어, 다중채무자 배제

우리은행이 지난달 31일부터 시행한 ‘신탁 후 재임대(트러스트 앤드 리스백)’는 한 달이 지났지만 신청자가 단 1명뿐이다. 이 제도는 하우스푸어의 집을 신탁회사에 맡기고, 형편이 좋아지면 집을 되살 수 있도록 한 방안이다. 신탁 기간에는 연 15~17%의 고금리 대신 4.15% 정도의 임대료를 내는 방식이다. 신한은행이 지난달 19일 내놓은 ‘주택 힐링 프로그램’도 현재까지 131명이 신청했다. 당초 “9000명이 혜택을 볼 것”이라던 전망이 무색하다. 이 프로그램은 대출금을 갚기 어려운 사람에게 최장 1년간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2%로 깎아주고 1년 뒤 갚도록 유예하는 방식이다.
신청자가 적은 것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다. 신탁 후 재임대는 집이 한 채뿐이고 실제 그 집에 살아야 하며, 다른 금융사에 빚이 없어야 한다. 또 대출이자 수준의 임대료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은행이나 저축은행 등에 대출이 있는 다중채무자는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어 6억원짜리 집을 담보로 우리은행에서 2억원을 대출받은 뒤 신한은행이나 국민은행 또는 저축은행·신용협동조합 등에서 1000만원을 빌렸다면 신청할 수 없다. 주택 힐링 프로그램도 이자를 유예해줄 뿐이다. 적게 낸 이자는 1년 뒤 몰아서 내야 하는데, 연체이자를 한꺼번에 갚게 돼 있어 자칫 이자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은행 입장에서는 조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다중채무자를 배제한 것은 채권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이 다른 금융기관에서 받은 소액대출을 대환대출해주고 신탁 후 재임대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시행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2주택자까지 대상을 넓히는 것도 쉽지 않다. 실수요자가 아닌 투기 목적으로 주택을 구입한 사람에게까지 낮은 이자를 적용해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 ‘뒷짐’만 지고 있는 금융당국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30일 가계부채 문제 세미나에서 “집값 하락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하우스푸어는 전체 국민의 0.6% 정도”라며 “종합적으로 판단해도 당장 긴급한 조치나 특별대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도 최근 “하우스푸어 문제는 사전 채무조정이나 경매유예 제도로 관리할 수 있는 단계”라며 “하우스푸어 문제가 아직 절박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금융정책 및 감독 당국 수장들이 하우스푸어 문제가 최악의 상태까지 가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은행의 하우스푸어 프로그램 성과가 미흡하다고 하우스푸어 문제 자체가 심각하지 않다고 결론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신용회복위원회 자료를 보면,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프리워크아웃 신청자 중 월소득이 200만원을 넘는 경우는 15.6%이었다. 개인워크아웃 신청자 중 월소득 200만원 초과자는 4.8%(2667명)였다. 지난해 비율이 각각 13.4%, 3.6%였던 것을 감안하면 빚을 갚지 못하는 중산층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백주선 변호사는 “빚을 내 주택을 마련한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다”면서 “정작 문제가 되는 저축은행이나 캐피털사에서 빚을 낸 다중채무자를 제외한 채 하우스푸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했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하우스푸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제2금융권도 참여하고 제도적인 신용보강을 통해 리스크를 낮춰야 하는 등 당국이나 금융권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