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경험과학의 실증이라는 함정서 벗어나 ‘사회체계이론’ 구축한 루만읽음

김항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사회의 사회…니클라스 루만 지음·장춘익 옮김 | 새물결 | 1344쪽 | 8만9000원 (전 2권)

“연구 대상 : 사회이론, 연구 기간 : 30년, 비용 : 없음.” 1969년, 교수 임용에 즈음해 한 연구자가 대학에 제시한 연구계획이다. 이 연구자를 초빙한 독일 빌레펠트 대학은 1969년에 설립되었는데,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독일 대학의 전통에 비추어봤을 때 매우 이질적이고 실험적인 연구·교육기관이었다. 훔볼트 이래 베를린 대학으로 대변되는 독일 대학은 인문정신을 모토로 삼아 보편적 교양 교육을 통해 전인적 인격을 갖춘 사회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빌레펠트 대학은 그런 독일 대학의 전통과 상이한 이념과 조직 구성을 내세웠다. 이 대학은 후기 자본주의의 분화된 사회 안에서 개개인이 고도의 기능·전문성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연구-교육의 선순환적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연구를 촉진시켜 전통적 학문 분과의 심화보다는 새로운 융복합 학문의 연구영역 창출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 빌레펠트 대학의 사회학과에 20세기 후반 ‘체계이론’의 대가로 추앙받게 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사진)이 초빙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고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루만의 사회체계 이론은 독일 인문학의 핵심에 자리하는 근대 인식론 및 존재론의 방대한 자원은 물론 현상학, 해석학, 언어학 및 과학철학 등 20세기 초반의 급진적 형이상학 비판의 성과를 바탕에 깔고, 생물학, 사이버네틱스, 신경생리학 그리고 복잡성 이론에 이르는 현대과학의 성과를 망라해 사회체계론을 정초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세대가 이룩해 놓은 세계에 대한 앎을 자유자재로, 그러나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접목시켜 하나의 거대이론을 탄생시킨 셈이다.

[책과 삶]경험과학의 실증이라는 함정서 벗어나 ‘사회체계이론’ 구축한 루만

이렇듯 복잡하고도 난해한 이론을 정초하려 했던 루만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회’를 이론화하는 일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를 그 어떤 초월적 전제에 환원하지도 않고, 또 몇몇 요소들의 관계양상으로 분해하지도 않고, 복잡하게 얽히고 얽힌 이 ‘사회’라는 기이한 개념·사실을 기술·설명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만의 이론은 고전사회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고전사회학의 기획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뒤르켐, 베버, 짐멜 등이 추동했던 고전사회학의 기획은 ‘사회’를 고전경제학의 모델, 즉 개인을 단위로 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모델에 대한 비판이었다. ‘사회’는 개인의 의지나 행위 결과의 집합체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개인의 의지나 행위를 규율하는 독자적인 ‘사실’이라는 것이 고전사회학의 기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고전사회학은 ‘사회’라는 하나의 지평을 발견하고 그것을 물음의 대상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루만은 고전사회학의 이런 기획은 이후 약 100년 동안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그 까닭은 ‘사회’라는 독자적 지평을 발견하고서도 여전히 사회를 개개인들 사이의 관계망으로 구성된 집합체로 정의함으로써 사회를 ‘인간’으로 환원해 온 데서 연유한다. 이는 ‘사회’를 ‘사실’이 아니라 인간 사이 관계의 총체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사회학이라는 학문분과를 성립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사회에 관한 기술(description)인 사회학이 사회 내부에서 이뤄진다는 자기언급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온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사회라는 관찰대상을 사회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회학적 지평의 근본 한계에 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관찰·기술자인 사람이 사회 밖에서 사회를 기술할 수 없다면, 사회학이란 기본적으로 사회의 스스로에 대한 자기기술인 것이다. 루만의 사회체계론이란 이런 기존 사회학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출발해, 기존 사회학의 전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적 자원들을 원용한 거대이론이라 할 수 있다.

[책과 삶]경험과학의 실증이라는 함정서 벗어나 ‘사회체계이론’ 구축한 루만

이제 서두의 저 간결한 연구계획의 의미를 알 수 있다. 특히 “비용 : 없음”의 의미는 중요한데, 인문사회학의 연구에서 비용이 소요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장조사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 때문이다. 루만은 현장조사도 회의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연구계획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경험과학의 실증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고, 스스로의 체계이론을 단독으로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이론에는 사례연구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방대한 참고문헌으로 이뤄진 촘촘한 이론적 짜임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 출간된 <사회의 사회>는 이런 루만의 단호하고도 고독한 작업의 총결산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서 루만은 스스로의 사회체계론의 문제의식, 개념, 논리적 구축, 귀결을 매우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사회체계와 커뮤니케이션을 설명한 1, 2장은 루만 이론의 기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다소 복잡한 설명으로 구성된 3, 4, 5장 또한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독창적 이론가의 논리적 구성능력에 탄복하게 될 것이다.

모든 저서들은 저마다의 역사적 상황 판단에서 그 상황에 대한 응답을 제시한다. 번역 또한 마찬가지다. 루만이 유명하기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번역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무언가 다른 메시지가 이국의 이론을 번역·소개하는 데에는 깃들어 있다. 이 번역서에 깃들어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감히 추측하건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문제를 구성하고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검증 불가능하고 전통적 도덕·규범에 기댄 ‘허명(虛名)’에 기대는 일 없이(루만의 경우 ‘인간’이 바로 그 허명이었다) 물음을 끝없이 밀고나가자는 일, 이것이 지금 “비용 : 많으면 많을수록 좋음”이란 연구계획이 횡행하는 한국 인문사회학계에 던지는 메시지라 느껴지는 것이다. 루만의 사회체계론을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보다 먼저 이 책에서 읽어야 될 것은 바로 그런 ‘앎을 조직화하는 기본기’라는 점을 되새기면서 모자란 글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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