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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34년 만에 청와대 재입성

입력 2012.12.19 23:26

  • 이지선 기자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만들어 갈, 대한민국의 변화와 혁신, 기다려지지 않습니까.”(11월18일 인천 송도 컨벤시아 비전선포식)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이 외침이 현실이 됐다. 국내 첫 여성대통령 ‘당선자’가 돼 역사를 쓴 것이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박 당선자는 “중년 남성이 지배적이고”, “2012년 세계경제포럼(WEP) 성차별 지수에서 108위에 올라 107위 아랍에미리트연합과 109위 쿠웨이트 사이에 위치한”(17일자 타임 아시아판) 한국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 쿠데타, 유신,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등 과거사 문제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내내 발목을 잡았지만, 박 당선자는 때로는 고개를 숙이는 전략으로 때로는 정면돌파로 길을 헤쳐나왔다.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를 나온 뒤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리가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청와대에 재입성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수영장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물놀이

초등학교 시절 수영장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물놀이

■ 어린시절과 부모의 비극적 죽음

박 당선자는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육군 정보학교장이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장녀다.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가 최고 권력자리에 오르면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학창시절 박 당선자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장충초등학교, 성심여자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조용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청와대에 산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나날이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1974년 8월15일 어머니가 문세광의 총을 맞고 서거한다.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박 당선자는 갑작스럽게 귀국해 퍼스트레이디 대리 역할을 한다. 이 기간을 박 당선자는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로부터 정치란 무엇인지를 습득하는 기간이었다.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고 숨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박 당선자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당시의 아픔을 이렇게 적었다.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 부모 모두 총탄 맞고 숨져
정치 입문 전 18년간 야인
1998년 대구서 의원 당선

▲ 2004년 천막당사서 활약
선거의 여왕으로 불려
과거사 논란 딛고 승리

■ 정치 입문 전까지 18년 공백

청와대에서 나와 서울 신당동으로 돌아간 박 당선자 머릿속엔 권력의 무상함, 배신 등이 각인된다. 그는 이 시기를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됐다”고 인식하면서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고 기억했다.

이 시기 박 당선자는 책을 읽고 단전호흡을 하며 문화기행을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지를 알리는 일에도 몰두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되었다. 나는 가만히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며 “지금도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부모님 추모사업’이 자식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고 썼다.

당시 박 당선자 사생활이 선거과정에서 검증의 도마에 올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6억원을,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성북동 집을 받은 일 등이다. 박 후보는 6억원에 대해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받았다”고 했다. 성북동 집은 “부모님 유품 정돈 등을 해야 하는데 집이 좁아 꼼짝할 수 없는 사정을 안 신기수 회장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했다.

1960년대 소풍 때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

1960년대 소풍 때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

■ 정계입문과 선거의 여왕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박 당선자를 정계로 이끈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게 박 당선자 회고다.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1998년 대구 달성 재·보궐 선거에 박 당선자를 출마시켰고, 그는 안전기획부 기조실장을 지낸 여권의 거물 엄삼탁 후보를 눌렀다. 박 당선자는 이 선거를 ‘달성대첩’이라고 부른다.

정계입문 이후 단숨에 초선 부총재로 뛰어오른 박 당선자는 대선 후보 경선 방식 및 당 지도체제 변경을 요구했다. 총재직 폐지와 당권·대권 분리 등이 당헌 개정안에서 배제되자 2002년 2월28일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5월10일 박 당선자는 방북해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 백화원영빈관에서 단독 면담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박 당선자는 이산가족 상설 면회소 설치, 금강산댐 남북 공동조사단 구성, 남북한 철도 연결 등을 제안했다. 당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논의에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은 그를 다시 불렀고, 탈당 9개월 만에 복당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낙선했다.

‘차떼기 부패당’이라는 오명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까지 맞아 2004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풍전등화였다. 박 당선자는 위기의 당을 구할 대표로 선출된다.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고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했다. 악수로 퉁퉁 부은 오른 손에 붕대를 감고 전국을 누비며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TV정당 방송연설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결과 한나라당은 121석을 획득했다. 이때부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2006년 지방선거 운동 때에는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을 면도칼로 베이는 테러도 당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으며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박빙의 대전 판세가 뒤집어졌다.

2004년 천막당사로 옮기기 위해 현판을 떼내고 있는 모습

2004년 천막당사로 옮기기 위해 현판을 떼내고 있는 모습

■ 경선패배와 재도전

박 당선자는 2007년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상대는 당내 기반은 박 당선자보다는 약했지만 외부에서 바람을 몰고 온 이명박 전 서울시장. 정당사상 최초로 당 차원의 후보 검증 청문회까지 치르며 본선을 방불케 한 격렬한 예선전을 펼쳤지만 박 당선자는 탈락했다.

당시 박 당선자는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경선과정의 모든 일들, 이제 잊어버리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가 없다면 며칠 몇날이 걸려서라도 잊자”는 승복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박 당선자와 친박근혜(친박)계 인사들은 이명박 정권 내내 비주류로 지냈다. 대선 이후 잇따라 열린 2008년 총선 공천에서 밀려나면서 ‘친박 대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박 당선자는 공천 결과를 두고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했다. 세종시 문제에서 보듯 이명박 정부 동안 당내에서 박 당선자는 마치 야당처럼 권력 핵심에서 거리를 유지했다.

2011년 다시 당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자, 그는 또다시 구원투수로 나섰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사실상 추대된 박 당선자는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 ‘4대강 사업 반대’ 등으로 이름을 알린 이상돈 중앙대 교수, 20대 청년 이준석 클라세스튜디오 대표 등 외부인사를 비대위원으로 영입하며 쇄신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당 색깔인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4·11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얻어냈다. 명실공히 ‘박근혜당’이 된 새누리당에서 박 당선자는 8월20일 84%의 득표율로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18대 대선 유세에서 지지자들에 손 흔들며 인사

18대 대선 유세에서 지지자들에 손 흔들며 인사

■ 과거사 논란 속에서 ‘준비된 여성대통령’으로

대선 후보로 확정된 다음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고향인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방문 등 대통합 행보를 이어가며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8월28일 유족과 합의없이 진행된 전태일재단 방문이 무산되며, 통합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5·16 쿠데타를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한다”고 한 데다, 유신시절 대표적 공안사건인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고 말해 역사 인식 논란이 빚어졌다.

결국 9월24일 기자회견을 열고 과거사와 관련해 “사과드린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는 “5·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는 본인의 발언은 취소하지 않았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박 당선자가 이사장으로 재직한 정수장학회 처리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이 MBC 사측과 만나 장학회 지분 매각 관련한 논의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정수장학회 ‘장물’ 논란이 제기됐다.

이후 박 당선자는 여성대통령론을 꺼내든다.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고, 문재인 후보와 접전 끝에 당선됐다.

[박근혜가 걸어 온 길]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34년 만에 청와대 재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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