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로가 빠른 길일까

김광호 정치부 차장

당신이 수영선수라고 가정하자. 지금 볕 좋은 해변에서 가족들과 느른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다. 바람은 기분좋게 귀밑을 간질인다. 돌연 바늘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공기를 찌른다. 당신이 턱을 괴고 누운 모래 위 2시 방향(오른쪽 앞)에서 한 어린아이가 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엔 이미 물이 차고, 어지러운 손놀림 주변에선 포말들이 일렁인다. 거리는 100m쯤. 당신과 그 아이 사이엔 쨍쨍한 모래사장과 파도 치는 바다가 가로놓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갈 것이다. 당신은 이상과 정의감에 불타는 평범한 시민이니까. 물에 대한 자신감도 있다.

[마감 후]직진로가 빠른 길일까

하지만 어떻게 달려갈 것인가. 그 아이를 향해 곧바로 빛처럼 달려갈 것인가. 머릿속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당신이 직선으로 달려간다면 오히려 늦을 수 있다. 아무리 빼어난 수영 솜씨로도 모래 위를 달리는 속도보다 빠를 순 없다. 당신은 직선이 아니라 우회하듯 달려야 한다. 헤엄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뛰어가는 거리를 길게 하는 것이 불과 몇 초 차이라도 빨리 그 아이에게 닿는 길이다.

이 이야기는 ‘페르마(Pierre de Fermat)의 광속도 문제’라는 과학적 원리를 설명할 때 종종 드는 예화다. ‘굴절률이 다른 두 매질에서 빛이 선택하는 길은 굴절률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우주 가스층과 암흑공간, 대기, 구름 등 서로 다른 성질의 공간을 거쳐 얼굴에 도착하는 태양은 당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온 직선의 빛은 아닌 셈이다.

이런 과학 원리를 인문계적 감수성에 ‘통섭’적으로 대입한다면 효율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진실은 곡선”이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얻어야 하는 정치 관점에서 보면 ‘동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긍정·부정 양갈래 여론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긍정의 공간을 최대한 늘리고, 부정적 매질을 최대한 줄이는 게 페르마 원리에 따르면 효율일 것이다. 그냥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부터 연일 ‘신뢰’를 말했다.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라며 가장 앞줄에 놓고 강조한다. 지금 이런저런 ‘약속 위반’ 논란이 있지만, 통치 ‘권위’의 출발점을 ‘신뢰’로 삼은 것이다. 이전 대통령들이 ‘경제 성장’ ‘국가 변혁’ 등 큰 가치와 구호로 국민동원에 나서던 것에 비하면 신뢰는 너무 당연하고 추상적이며 소박하다. 박 대통령이 페르마식 ‘관계와 정치의 미학’ 비밀을 조금은 엿본 게 아닐까.

하지만 새 정부 첫 내각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된 지금 여론의 표정은 착잡하다. 인선 상당부분을 국회에서 ‘땡처리’하듯 넘겼지만, ‘문제적 인물’들인 김병관 국방부 장관,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여전히 어정쩡한 채 남았다. 연일 언론사엔 전화가 걸려 온다. 21일에도 공무원 출신이라고 밝힌 60대 노신사는 “국가관을 거론할 자격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도저히 땡처리도 못할 하자품들이 아닌가하는 찝찝함이 뒷머리를 당긴다. 청문회가 한참 지났지만 박 대통령도 선뜻 ‘임명 강행’을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훅’ 털어버리자니 한 달 넘도록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정부 모습이 안쓰럽다. 실상 주식판 말로 ‘손절매’ 타이밍도 놓쳤다. 인사권자 입장에선 계륵이 돼 버렸다. 버리자니 손해가 크고, 삼키자니 가시뼈에 목이 찔릴 것 같다.

이제 당신 앞에는 ‘신뢰’라는 소망하는 과실이 놓여 있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버려 사라질 만큼 연약하다. 거기까지는 가시덤불과 들판을 모두 지나야 한다. 그냥 직진로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가시덤불을 돌아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어쩌면 멀고 힘들어 보이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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