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
리처드 폴 로 지음·유향란 옮김 | 오브제 | 452쪽 | 2만원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열세 편이다. 모국인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수와 맞먹는다. 그 밖에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극소수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왜 유독 이탈리아를 편애했을까. 셰익스피어가 실제로 이탈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을까. 책은 이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무대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베로나이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 1막 1장에 단풍나무가 등장한다. 저자는 여기서 한 가지 추정을 해본다. 만일 셰익스피어가 베로나를 방문한 적이 없다면 ‘시가지 서쪽 단풍나무숲’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저자는 베로나에 도착하자마자 단풍나무숲부터 찾았다. 숲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단풍나무는 드문드문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출간된 지 수백년이 흘렀지만 이탈리아 베로나는 작품 속 장소를 적잖게 보존하고 있다.
베로나에는 두 연인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 전설을 모태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탄생 이전 베로나를 다룬 설화나 기록 어디에도 단풍나무가 묘사된 흔적은 없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베로나를 방문했던 게 분명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시종 허구투성이 작품 소재들 속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증명하는 소재를 제시한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오래된 ‘신화’ 가운데 하나가 ‘영국 중부 지방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는 내용이다. 이 신화를 의심 없이 수용하는 학자들은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에 가봤을 리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이탈리아는 상상의 산물이거나 책에서 봤거나 들어서 아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이자 변호사인 저자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학문적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이탈리아를 수차례 답사하고 옛 문헌들을 꼼꼼히 조사한 끝에 ‘영국 대문호는 이탈리아 곳곳을 다닌 여행자였다’고 믿게 됐다.
<템페스트>의 배경이 된 볼카노 섬의 독특한 풍광과 동물은 영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글 쓴 사람이 언젠가 볼카노에 발을 디뎠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눈으로 보는 것 말고도 이탈리아 문화 체험이 녹아 있는 장면도 있다. 시칠리아 섬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한 <헛소동>의 숙녀 헤로와 하녀 마거릿, 어슐라 사이의 대화가 그 사례로 꼽힌다. 세 여성의 대화는 주인과 하녀 사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격의 없다. 계층 간 위계가 엄격한 영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시칠리아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체험하지 않은 16세기 영국인이 쓸 수 없는 디테일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과 삶]평생 영국 떠난 적 없는 셰익스피어? 그의 희곡 속 이탈리아가 반증한다](https://img.khan.co.kr/news/2013/04/19/l_2013042001002815900239542.jpg)
그런데 저자의 말마따나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했다면 셰익스피어가 한 명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농후해진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정체성 논란을 의식한 듯 책 속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작가’ 혹은 ‘저자’로 적었다. 어찌됐든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누구든 간에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쓴 작가는 상상이나 간접 경험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직접 체험하고 쓴 게 틀림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