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정치부 차장

아마도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71년 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도 되지 않은 일곱달짜리를 ‘두데기’(포대기)로 감싸 업은 채 대구 신천변 수십만명 인파 속에 서 있었다. 선거를 이틀 앞둔 4월25일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마지막 대선 유세지로 택한 대구의 유세장이었다. 한국정치사에서 ‘민주당’이란 흐름과의 첫 인연이었다. 기억의 한계를 넘는 그날 인연을 물론 난 실감하지 못하지만, 먼 의식 밑바닥엔 그 편린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해 김대중 후보는 95만표 차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한다. 하지만 그는 대구에서 32.5%의 득표를 했다.

지금부터 꼭 10년 전 어떤 인연의 사슬인지 정치부 기자로서 출발점도 민주당이었다. 그 인연이 반가웠던 것은 32년 전 원기억 때문은 아니다. 민주당은 우리 정치에서, 사회에서 어떤 이들에게 하나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반가웠다.

[마감 후]옛사랑

민주당으로 상징되는 정치는 한국정치사에서 ‘새 정치’, 즉 혁신의 수원이었다. 지배적 주류와는 ‘다른 가치’ ‘다른 열망’들을 담아내는 하나의 의미였다. 1971년 대선의 대중경제론과 평화통일론처럼 경제적으론 부족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누고, 남북 화해를 소망하며, 지역주의와 국가·정치·사회의 부패 구조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론 권력의 강압에 ‘평온한 두 눈만 커다란, 조용한 고아’(폴 베를렌 <가르파르 오제의 노래>)처럼 억눌린 작은 목소리들의 출로였다. 그래서 그 흐름은 “일단 중요한 자유가 적절히 보장되고 난 뒤, 공동체의 정치적 합의는 가장 빈곤한 계층이 최대한 부유해지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존 롤스 <정의론>)던 경제·정치 민주화의 정의를 실현하는 의미로도 읽혔다.

하지만 그 추억들은 이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처럼 애잔하고 스산하다. 민주당이 4·24 재·보선에서 받아든 성적표는 참혹하다. 단 한 곳도 당선자를 내지 못한 불임보다, 부산 영도와 충남 부여·청양 민심에서 확인한 그들 존재의 의미가 더 아프다. 지난해 대선과 총선에 비해 이들 지역 득표율은 반토막 났다.

박근혜 정부의 인사난맥과 불통을 고리로 정권심판 목소리를 높여 봤지만, 민주당 ‘이름’은 불려져 의미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 목소리는 대선 이후 주류·비주류로 갈라져 얼마남지 않는 자산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탐욕스러운 모습에 질식됐다. 그들은 ‘헌 정치’의 동의어가 되며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잎 한 잎 떨어져 마지막을 향해 나날이 쇠잔해 가는 나목(裸木)처럼 말이다.

그 사랑은 왜 초라해졌을까. 다른 가치를 말하던 ‘어리고 귀여운 꽃’은 어떻게 ‘백합처럼 시들어’(피천득 <인연>) 버렸을까. 그것은 가치를 권력으로 바꿔치기한 우리 마음속 불한당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 했지만, 민주당은 시련을 견디지 못했다. 선거 패배마다 바뀌던 그 무수한 ‘이름’들은 이제 기억하기도 벅차다. 상처입고 버림받아도 꼿꼿한 사랑으로 남기보다는, 승리에 눈 멀어 ‘화장질’에 익숙한 거리의 여인을 택했다. 그들은 더 이상 ‘누구도 듣지 않는 노래(가치)’를 목청껏 부르지 않는다. 이제 ‘새 정치’의 수원은 ‘안철수 현상’으로 담지되는 ‘중도’에 빼앗긴 것 같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그래서 정체 모를 ‘혁신’ 논쟁이 아니다. 그들의 달랐던 가치와 열망들의 복원이다. 모호한 중도·진보 논쟁 따위가 아니다. 에르네스토 데 게바라의 “사회주의는 세월 속에 사라질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싸움을 꿈꾸는 것”이란 충고처럼, 진정한 혁신을 위해 푸르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 ‘옛사랑이 피 흘린 곳’(김광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들어선 ‘수상한 낯선 건물(권력)’들을 뒤로하고, ‘여전히 제자리에 선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등대 삼아 옛사랑의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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