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시학 텍스트 ‘시품’을 통해 더듬은 동아시아 미학의 뿌리

서영찬 기자

궁극의 시학…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715 쪽| 3만8000원

중국 송나라 말엽에서 원대에 걸친 시기에 탄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이하 시품). <시품>은 네 글자 열두 구의 운문 24개로 구성된 텍스트이다.

24개 풍격(상징적인 말로 시의 인상을 표현하는 것)을 시로 표현했는데 ‘시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길을 제시한 시학 텍스트다.

[책과 삶]시학 텍스트 ‘시품’을 통해 더듬은 동아시아 미학의 뿌리

200자 원고지 여섯 장 분량에 불과한 이 저작물은 중국은 물론 조선의 문인과 서화가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시품>을 읽고 또 읽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고 문장력을 갈고닦았다. <궁극의 시학>은 <시품>을 해부하고 그 파급력을 좇아 동아시아 미학의 뿌리를 더듬은 책이다. 저자는 <시품>이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시품> 가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풍격은 ‘웅혼’이다. 웅혼은 광활한 공간과 역동적인 힘을 묘사한다. 웅혼 중간 단락은 이렇다. ‘무한한 만물을 가슴에 채우고/ 드넓은 창공을 가로질러 가노니/ 뭉게뭉게 먹구름은 피어나고/ 휘익휘익 긴 바람은 몰려온다.’ 영웅, 기백, 거대한 산맥, 드넓은 창공 등이 연상된다. 어떤 중국 학자는 “문장으로는 장자와 사마천, 시는 이백과 두보만이 웅혼의 작가가 될 만하다”고 했다. 또 다산 정약용은 아들 학연에게 준 편지에서 시를 지을 때 웅혼을 추구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육사의 시 ‘광야’가 웅혼의 풍격에 근접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지닌 ‘굳건함’은 웅혼의 미학과 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추사도 <시품> 마니아였다.

청나라 건륭제는 <시품>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래서 장유, 반시직 같은 화가들에게 <시품>을 그림으로 구현하게 했다. 조선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도 <시품>에 매료돼 24폭의 그림을 남겼다. 또 같은 시기 문인 이광사는 <시품>을 필사했는데 24개의 풍격을 각기 다른 서예 기법으로 절묘하게 구현했다. 책 속에서 이들의 작품을 음미할 수 있다.

‘침착’ ‘고고’ ‘호방’ ‘경건’ ‘자연’ ‘초예’ 등처럼 <시품>은 24개의 열쇳말로 미학을 범주화했다. 가령 ‘형용’은 사물을 제대로 묘사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고, ‘초예’는 ‘세속과 다른 길’을 가듯 초월적인 풍격이며, ‘소야’는 시골 생활처럼 거칠고 꾸밈없는 미의식과 관련된다. 저자는 비분강개를 의미하는 ‘비개’의 미학은 비운의 영웅 항우와 형가가 읊은 시 정도에서만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형가는 조국 연나라를 패망시킨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비극의 주인공.

<시품>은 구구절절 대단히 함축적이다. 추상적 언어 또한 많다. 그래서 천천히 곱씹고 깊이 음미해보지 않고선 그 뜻에 가 닿을 수 없다. 마지막 편 ‘유동’에 나오는 ‘물을 받아들이는 수차와도 같고/ 쟁반에 구르는 구슬과도 같다’는 풍격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함축’ 편에 ‘한 글자도 쓰지 않고/ 풍류를 모조리 표현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시품> 자체도 그 같은 경지에 이르러는 노력의 결과물인 듯하다.

유일하게 여성적인 풍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기려’이다. 기려는 비단처럼 화려하다는 뜻인데 이 풍격은 궁궐, 화려한 인생, 여인들의 다정다감한 세계와 어울린다. 위진남북조 시대 남녀 애정지사를 농염하게 묘사하고 사치스러운 궁궐, 도회지 문화를 그린 <옥대신영>이 이 범주에 드는 대표적 작품이다. 하지만 당나라 이후 기려는 대접받지 못한 풍격이 됐다고 한다. 그 까닭에 기려는 중국 한시에서 흔하지 않은 미의식이다. 저자는 기려를 잘 표현한 문인으로 ‘비 갠 강둑에 풀빛 짙어가는데’로 시작하는 ‘송인’을 지은 고려 문인 정지상을 손꼽는다.

저자는 <시품>을 관통하는 미의식은 ‘담박함’이라고 말한다. 이는 화려하되 과도하지 않으며 기개를 드러내되 은은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한시가 절제의 미학을 지녔다고 볼 때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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