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길혜연 지음 | 문예중앙 | 351쪽 | 1만4000원
프랑스에 거주하며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는 저자는 한때 서울 한복판 빌딩들이 있는 곳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어느날 사무실 창밖을 내다보며 ‘여기서부터 집까지 푸른 해변이 이어져 맨발로 걸어갈 수 있다면’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소금기 머금은 바다 내음과 잔물결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 상상이 계시가 된 듯, 곧바로 직장을 떠났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세월을 떠맡긴 채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에게 되물을 것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책과 삶]나를 설레게 한 프랑스 문학의 시간과 공간을 뒤죽박죽 드나들다](https://img.khan.co.kr/news/2013/05/24/l_2013052501003519500288221.jpg)
직장을 떠날 결심을 하기 전까지 저자의 머릿속에서는 이 같은 물음이 맴돌지 않았을까. 저자가 찾아나선 ‘설렘’의 실체는 문학이다. 특히 프랑스 문학은 학창 시절 저자의 감수성을 흔들고 그 인연으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다.
책은 저자가 사랑하고 교감한 프랑스 작가에 대한 문학기행 에세이다. 자크 프레베르, 생텍쥐페리, 알베르 카뮈, 에밀 졸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작가 10명의 작품을 음미하고 삶의 흔적을 더듬는다. 저자는 “그간 읽었던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씩 둘씩, 그러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어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러곤 “떠나라, 떠나라” 속삭였다.
파리 생제르맹 대로 뒤편에 있는 퐁 루아얄 호텔. 1935년 12월 마지막 날 밤 이곳에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사막 비행 도중 불시착한 생텍쥐페리의 소식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최대 출판사 갈리마르와 이웃해 있는 이 호텔은 한때 문인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별명도 ‘문학 호텔’이다. 하지만 이제 문인들의 북적거림은 과거가 됐다. 저자에게도 문학을 공부하며 설렘과 열정이 북적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파리 몽파르나스는 샹송 <고엽>을 작사한 자크 프레베르에게 의미 있는 아지트였다. 또 칸과 망통은 장 콕토의 도시이다. 시인 프랑시스 잠은 피레네 산기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들 장소는 저자에게 작가와 작품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연상 작용은 저자 자신의 추억과 교감한다. 쥘 베른이 18년간 머물며 집필에 전념했던 아미앵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 한옥 다락방을 떠올린다. 저자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의 <15소년 표류기>를 통해 쥘 베른을 처음 만났다. 이 소설 속 인물 브리앙이 ‘프랑스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켰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책을 읽던 다락방에 놓인 연장통 등 사물들의 냄새를 새삼 기억해낸다. 다락방 기억 속에는 설레었던 순간이 아로새겨져 있다.
저자가 길 위에서 만난 바람 한 점, 종소리 하나, 풀 내음 한 모금은 문학과 교감하는 매개물이다. 작가 프루스트는 마들렌이라는 과자 냄새를 통해 과거 기억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저자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뒤죽박죽 드나든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잃어버린 설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