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정가에서 ‘시골뜨기’ 취급을 받던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를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성공으로 이끈 것은 한마디였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이다. 그 앞에서 1차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화당의 ‘위대한 미국’ 구호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노무현 정부가 실질적 권력을 획득한 것은 ‘탄핵풍’을 타고 과반 여당이 된 2004년일 게다. 당시 정권 실세이던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은 여권 내 ‘성장이냐, 분배냐’ 논쟁에 “결국 파이가 커야 나눠지는 것”이라고 했다. 재벌들이 노무현 정부 출범을 마뜩잖아 하던 2003년 6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당장 제 몫 찾기보다 파이를 빨리 키우기 위해 국민이 노력해야 한다”는 미묘한 발언과 닮았다.
![[마감 후]‘바보야, 문제는 정치야!’](https://img.khan.co.kr/news/2013/08/01/l_2013080201000171300014642.jpg)
이처럼 ‘파이론’은 불균형이 문제 되고 ‘분배의 경제’가 운위될 때마다 얼굴을 내민다. “분배는 투자 의욕을 꺾는다”거나 “일자리를 만드는 건 기업”류 방어막들도 ‘파이론’의 다른 반쪽처럼 따라붙었다.
그럼 과연 그 시기 파이는 커졌을까. 커진 파이만큼 우리 삶도 나아졌을까.
2004년 국내총생산은 826조8927억원이었다. 파이론을 확대재생산한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의 경우 1272조4595억원에 달했다. 9년 새 445조5668억원(53.9%)이 늘었다. 특히 파이론 요체인 제조업의 경우 201조1713억원에서 315조2051억원으로 56.7%나 성장했다.
하지만 통계가 존재하는 2005~2010년 우리 일반가구 임금소득은 3370만원에서 3490만원으로 6년간 120만원(3.6%) 늘었다. 얼핏 보면 제자리걸음 같지만, 같은 기간 연평균 물가상승률 3.0%를 감안하면 실질소득은 한참 줄었다. 물가상승을 반영한 2010년 소득은 4024만원이 돼야 2005년과 동일하다. 미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클린턴 당시인 1996년 미국 중위 가구 소득은 2011년 화폐가치로 5만661달러였다. 하지만 2010년 중위 가구 소득은 5만54달러로 줄었다. 파이는 커졌지만, 중산층 소득은 퇴보했다.
그럼 ‘누가 내 파이를 가져갔을까’.
짐작하는 바 대로다. 1979~2007년 미국 상위 1% 소득자들 세후 소득은 275% 늘어난 반면 중위 소득자들 소득 증가율은 40% 미만이었다. 커진 파이 대부분은 자산소득으로 귀결될 뿐이다. 늘어난 비정규직은 임금소득 하락의 한 부분일 터다.
지난해 대한민국 대선은 이 ‘파이론’을 극복하는 선거였다. 실상 박근혜 정부 탄생도 ‘파이론’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시장 보수주의에 반하는 ‘경제민주화’란 역설로 표심을 흔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두려움에 찬 파이론’이나 이명박 정부의 ‘신념화한 파이론’이 민생을 악화시켰다는 깨달음들이 배경이었다.
하지만 집권 반년이 지난 지금 ‘이상 조짐’이 감지된다. 경제민주화 입법엔 서둘러 ‘마침 종’을 울렸다. 대신 ‘투자 활성화’를 입에 올린다. 기업 세무조사 축소를 발표하고, 재벌 일감 몰아주기 과세 완화 방침도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지난달 31일 실제 한 투자자를 업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렇다. 이쯤이면 문제는 경제가 아니란 걸 누구나 안다. 문제는 수치로 표시되는 경제를 두려워하고 성장 외엔 모르는 정치의 무지에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최근 저서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 정치 시스템은 갈수록 ‘1인 1표’ 원리보다는 ‘1달러 1표’ 원리에 동화돼 가고 있다”고 탄식한다. 정치가 무지한 단계를 넘어 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스티글리츠는 “경제적 불평등 심화는 정치 권력의 불균형 심화로 이어지고 정치와 경제의 사악한 결합을 낳는다”고도 했다.
집권 반년 만에 재벌에 투자와 고용을 구애하며 투항하는 단계로 접어든 박근혜 정부. 그 한편에서 정치권을 블랙홀로 만든 ‘국가정보원 정치’ 논란은 파이론의 허상을 가리는 ‘사악한 결합’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