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행의 시대…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175쪽 | 1만3000원
근대의 문화는 계몽적 성격이 강했다. 지배계급과 지식 엘리트는 민중을 기르는 일, 즉 계몽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밭을 경작하듯 민중을 기르는 일(cultivating)이 문화의 본분이었다. 문화라는 것은 결국 민중에게 규범을 주입해 사회질서를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왕정시대 프랑스에서 등장한 ‘문화 정책’은 근대까지 국민 계몽이 주임무였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문화는 식민지의 문명화를 일컬었는데 문명화는 열등 시민을 계몽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 혁명의 시대에서 문화는 사회 계급을 선명히 드러내고 유대를 다져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바우만의 전매특허 개념인 ‘유동하는 현대’에 문화는 더 이상 계몽도, 사회질서 유지의 도구도, 계급의 창도 아니다. 문화가 사회적 차원을 벗어나 개인화됐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에는 계몽하거나 고상하게 할 ‘민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유혹할 고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유혹은 온전히 욕구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행위에 관여한다. 물론 소비 시장이 욕구 창출을 주도한다. 문화는 이제 시장의 손에 넘어갔다.
시장은 유행을 통해 문화를 요리한다. 유행을 따르는 것은 ‘소비하는 시민’의 공통 의무가 됐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유행을 좇을까. 바우만은 유행을 사냥에 비유하며 이에 답한다.
사냥꾼은 사냥감을 잡았다고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사냥의 쾌감과 흥분, 즉 욕구야말로 사냥꾼의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에 사냥꾼은 끊임없이 사냥감을 찾아 나선다. 그에게 과업의 완수, 사건의 종결 같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냥을 멈춘다는 것은 삶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사냥을 마약과 같다고 했다. “한 번 맛보면 습관이 되고, 내적 필연성이 생기며,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유행의 속성과 똑같다.
바야흐로 우리는 사냥꾼 사회를 살고 있다. 씁쓸하지만 이것이 우리 시대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유행의 시대에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곰곰이 따져 물을 겨를은 없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묻는 행위는 부질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유동하는 현대는 세계화가 촉발한 디아스포라(이주)의 시대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이 과정에서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렸다. 하지만 바우만은 다문화주의를 비판적으로 본다. 다문화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포장해 보편적 가치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권력층과 부유층은 다문화주의가 뿌리내릴수록 그들만의 특권을 지켜내기가 쉬워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