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과 문명…루이스 멈퍼드 지음·문종만 옮김 | 책세상 | 682쪽 | 3만2000원
기계가 인류의 삶 속으로 들어온 전환점은 언제일까. 우리는 와트의 증기 기관이나 산업혁명을 떠올린다. 대다수 학자들도 기계시대는 18세기 중반에 열렸다고 말한다. <기술과 문명>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지난 3000년 동안 기계가 인류 기술유산의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했고, 10세기부터 기계 문명이 완만히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실질적인 기계의 탄생지가 근대 영국의 공장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 군대, 회계 사무소였다고 말한다. 수도원은 수도사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다. 일과는 시간표에 따라 철저히 관리됐다. 필요가 발명을 낳듯 시간관리의 필요성은 정밀한 시계를 탄생시켰다. 시계는 수도원을 넘어 도시로 파급됐고 노동자와 상인의 삶을 뒤바꿨다. 시계의 탄생과 발달은 기계가 삶을 변화시킨 대표적 사례다. 저자에 따르면 산업시대를 있게 한 동력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이다.
기술과 기계의 역사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다룬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기술과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상이다. 그래서 저자는 기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계의 물질적 기원뿐만 아니라 문화적 배경과 심리적·윤리적 기원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1930년대에 발간됐는데, 기술사를 경제적인 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이 당시 학계의 주류였다. 이 때문에 책은 사회학 건축사 문화비평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저자가 당대 역사학계에 내민 야심찬 도전장이었다.
저자는 기술문명을 원기술, 구기술, 신기술 등 3단계 시기로 나눴다. 원기술 시기는 풍력·화력 같은 동력원이 발전하고, 선박건조 기술이 발달한 게 특징이다. 구기술 시기는 산업혁명 시기와 겹치는데 석탄과 철의 문명이자 혁신의 시대이다. 하지만 저자는 혁신의 짙은 그늘에 주목한다. 이 시기에 불어닥친 개발 열풍은 환경 파괴의 서막을 열었고,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승자독식, 한탕주의가 난무했던 것이다.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은 서구문명의 우월주의에 대한 저자의 반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결국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이란 인간의 선택과 욕망이 빚어낸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기술은 선과 악이라는 두 얼굴을 지녔다. 전쟁이 기술 진보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인간에게 재앙을 안기기도 했듯이 말이다. 저자 고유의 기술유산, 거대기계, 기계 이데올로기 개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기계를 과학은 물론 종교·심리 같은 문화적 차원까지 동원해 설명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