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논란을 접한 또래들의 첫 느낌은 대부분 당혹감이었으리라. 소위 ‘이석기 녹취록’ 발언들은 내용의 실체성에서 충격·공포보다는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국민 상식이나 정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것들은 오히려 현실감을 교란시켰다.
“반미 대결전을 승리로 결집시키기 위해….” “(핵으로)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핵보유 강국이라는 것.” 또 어떤 이는 “인터넷에 압력밥솥 폭탄 매뉴얼 있다” “나를 잡으면 한 명을 죽이려고 칼을 넣고 다닌다”고 한다.
![[마감 후]피터팬 신드롬과 낡은 진보](https://img.khan.co.kr/news/2013/09/05/l_2013090601000897900068832.jpg)
나이 마흔줄 사람들이 모여 교환한 언어들치곤 참으로 낯설다. 중학교 시절 책가방에서 잭나이프나 체인을 꺼내 보이며 자기보호의 방편으로 삼던 철부지 ‘노는 애들’의 치기도 느껴진다. 빛나던 한때의 신비가 세월이 지나 속화되면 남는 것은 비루한 기억과 감정의 찌꺼기들뿐이다. 녹취록은 그런 굳은 기억들의 배설장과도 같다.
물론 과거나 지금이나 국가정보기관의 음습함은 가증스럽다. 독침 만년필 등 각종 증거물에 커다란 점조직 차트까지 곁들이며 간첩단을 발표하던 그들이 이번에 그런 것 하나 없이 ‘내란음모’란 어마어마한 카드를 꺼내 보였다. 한낮 공공장소에서 아이들까지 있는 130명이 ‘역모’를 모의했다는 농담 같은 현실이다.
하지만 법정을 떠나 상황은 이미 여론재판으로 종료됐다. 국정원의 현란한 ‘언론 플레이’ 속에 그들에 대한 ‘종북’ 딱지는 현실로 인정됐다. 극히 이례적으로 여야는 4일 동업자인 의원의 체포동의안에 ‘찬성 당론’을 결정했다. 그만큼 국민들, 진보진영이 느끼는 당혹감은 컸던 셈이다. 애초부터 목적은 법적 단죄보다는 여론의 단죄였는지 모른다.
시계를 거꾸로 사는 것은 수구들만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 사회는 ‘폭력 혁명론’이니, ‘무장투쟁론’이니 그 언저리를 여전히 맴도는 이들 또한 수구만큼이나 ‘마음이 자라지 못한’ 사회적·정치적 피터팬들로 보는 것 같다. “피로 지킨 나라”라거나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아느냐”며 핏대를 올리는 거리의 ‘애국 할배’들만큼 그들의 기억도 과거에 붙박여 있다.
피터팬 신드롬의 백과사전적 정의는 ‘성년이 돼도 어른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어른아이 같은 남성들이 나타내는 심리적 증후군’이다. 그들의 특징은 ‘무책임’ ‘불안’ ‘고독’ ‘성 역할의 갈등’ ‘나르시시즘’ ‘사회적 불능성’으로 규정된다. ‘이석기 녹취록’에서 묻어나는 ‘현실 격리’ ‘고립’ ‘불안’ ‘선민의식’과 겹쳐지지 않는가.
스스로 진보라고 외치지만, 1980년대 세대 일부는, 그들이 그토록 비웃던 앞세대들처럼 ‘낡은 세대’가 됐다. 변치 않는 그들 사유와 기억·언어들을 다음 세대, 즉 20대·10대들은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 없는 애들”이라고 오만을 떨어도 다음 세대에게 ‘쉰내 나는’ 구세대가 됐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푸르동이 친구 카를 마르크스에게 보낸 “사회의 모든 독단을 제거한 후 우리들 자신의 독단을 강요하는 어리석음만은 제발 범하지 말자”던 충고처럼 진보는 끊임없이 변하며 자기 갱신을 한다는 의미일 터다. 그래서 쉬운 길이 아니다. 유목민처럼 우리 삶과 공동체의 보다 나은 현재·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떠돈다.
결과적으로 ‘이석기 사태’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가 진보이기 위해 배제해야 할 ‘낡은 진보’가 어디까지인지를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것 같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공론과 합의 과정을 거쳐가고 있는지는 별론이지만 말이다.
이 시대 피터팬들이 내면의 좁은 세계에서만 유전할 때 그들은 사회적 의미를 얻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뒤 발표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을 ‘비판적 사유의 부재’로 규정했다. ‘비판적 사유’가 부재할 때 평범한 인간조차 악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처럼 말이다. 비판적 사유는 성장을 거부하는 피터팬들에겐 애초 존재하기 어려운 자질이다.
실상 ‘종북’은 사라져야 할 단어다. 상대를 철저히 배제하고 파괴하겠다는 싸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종’ 속엔 추종, 즉 ‘노예’란 맥락이 숨어 있다. 인격살인이다. ‘종북’이란 단어는 무비판적 친북 의미로 분리할 때만 그나마 존재 여지가 생긴다. 그 점에서 이번 여론 법정의 결론은 우리 사회가 북한에 대한 ‘무비판적 사유’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경계 긋기로 의미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