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삭이는 사회 1·2…올랜도 파이지스 지음·김남섭 옮김 | 교양인 | 각 560·604쪽 | 각 2만3000원
안토니나 골로비나는 여덟 살 되던 1931년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부모가 ‘쿨라크(부유한 농민)’라는 게 이유였다. 재산은 몰수당했고 가족은 찢겨져 노동수용소에 유배됐다. 3년 후 수용소를 나왔지만 ‘인민의 적’이라는 꼬리표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성장기에 주위의 비판과 학대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녀는 커가면서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숨기려 했다. 결혼해서도 남편에게 가족사에 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남편도 가족사에 대해 언급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남편의 과거를 알게 되는데, 그도 쿨라크 출신으로 수용소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스탈린 집권 시기(1927~1952년) 골로비나처럼 국가로부터 억압받은 소련인은 25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인민의 적’은 사회로 복귀해서도 공포를 떨치지 못했다. 언제 다시 유형지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심은 체제 순응주의를 낳았다. 피억압자들은 가족사는 물론 자신의 생각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강요당했다. 자연히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속삭이는 문화’가 뿌리내렸다. 속삭임은 소련 사람의 의식과 태도를 지배했다.
<속삭이는 사회>는 스탈린 체제가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침투했으며, 그들의 가치관, 도덕 및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탐색한 책이다. 저자는 1000명이 넘는 피억압자를 인터뷰하고 일기, 편지 등을 바탕으로 스탈린 시대의 그늘을 밀도있게 포착했다. 책은 스탈린 체제를 유지한 힘은 엄격한 국가 제도나 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일상화된 공포심이었다고 웅변한다.
소비에트식 주거 형태도 공포를 증폭하는데 일조했는데, ‘콤무날카’라 불린 공동 아파트가 그것이다. 이 아파트에는 여러 가족이 부엌, 화장실 등을 공유하며 함께 살았다. 그래서 콤무날카는 사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문을 열어놓고 살았고 아이들은 내집 네집 할 것 없이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감시했다. 당연히 사생활, 비밀 따위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됐다.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는 말이 유행했다. 속삭여야 안전했다.
90년대 개방 물결이 몰려와서야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허용된다. 하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침묵한다. 수용소에서 10년간 생활했던 한 시민은 2004년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50년 전에 복권됐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스탈린 시대가 막 내린 지 60년이 지났어도 러시아는 아직도 속삭이는 사회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