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클럽 회원들은 최근 마음고생이 심했다. 마라톤대회에 출전하고 싶어 각 대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거부를 당했다. “앞을 못 보는 장애인들이 무슨 마라톤이냐”, “달리다가 사고가 나면 지역 축제를 망친다” 등 이유도 다양했다.
회원들은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충북 영동군에 문의했다. 뜻밖에도 영동군은 흔쾌히 이들을 초청했다. 장애인 19명과 동반주자 등 회원 24명은 지난 1일 영동에서 열린 제10회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지난 1일 충북 영동군민운동장에서 열린 제10회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 영동군 제공
지역 장애인은 물론 타 지역 장애인들까지 대회에 초청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영동군이 그동안 영동포도 마라톤대회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화합의 장’으로 만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 대회는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전국에서 초청받은 장애인과 자원봉사 동반주자 81명을 포함해 마라톤 동호인 3198명이 출전했다. 매년 2000~2500명 정도가 참가한 점을 감안하면 영동포도 마라톤대회가 전국 규모 대회로 발돋움한 것이다. 대회본부는 풀코스 출발 5분 뒤 장애인과 동반주자들을 따로 출발시켰다. 이는 혼잡한 출발선에서 장애인들이 안전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전국에서 처음 시도됐다.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영동지역 주민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 주민들은 장애인 등 모든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서정길 과장·이운희 과장·임운경 위원장(왼쪽부터)
1급 시각장애인 손병석씨(51)의 양쪽에서 동반주자로 풀코스를 완주한 강윤중씨(54·진로소주 마산공장 사원)와 정인숙씨(53·서울 광화문마라톤클럽)는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들은 “급수대마다 자원봉사자들이 열렬히 응원하고 음료수 등 먹거리에 만전을 기해 영동 주민들의 정을 듬뿍 받으며 달렸다”며 “35㎞ 지점을 지나갈 무렵에는 도로 옆 가게 주인이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며 응원했다”고 밝혔다.
영동마라톤동호회 회원 3명도 시각장애인 동반주자로 나섰다. 서정길 영동군청 도시건축과장(56)은 김상용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회장(51)의 동반주자로 하프코스(21.09㎞)를 달렸다. 서 과장은 “김 회장의 딸이 중학생 때 아빠의 동반주자로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눈보라를 뚫고 달리는 과거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며 “그 딸을 생각하면서 김 회장이 안전하게 달리도록 이끌었다”고 말했다.
또 이운희 한국전기안전공사 영동옥천지사 과장(54)과 임운경 영동곶감울트라마라톤 조직위원장(64)도 동반주자로 달렸다. 이들은 다른 회원들과 동반주자·장애인 역할을 맡아 서로 팔에 끈을 묶고 ‘모의 훈련’을 해왔다.

지난 1일 충북 영동군에서 열린 제10회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에 출전한 한 1급 시각장애인 손병석(가운데)씨가 자원봉사 동반주자 강윤중씨(54·진로소주 마산공장·오른쪽), 정인숙씨(53·서울 광화문마라톤클럽·왼쪽)와 함께 42.195km 결승선으로 들어오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난 1일 충북 영동군에서 열린 제10회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에 출전한 1급 시각장애인 정운로씨(42·가운데)가 자원봉사 동반주자 4명과 함께 42.195km 결승선으로 골인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영동포도 마라톤대회는 주민과 영동군 직원, 대회 운영 관계자 등이 한마음이 돼 성공리에 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특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축제로 꾸며 마라톤 동호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정구복 영동군수는 “영동포도 전국마라톤대회는 전국에서 마라톤을 좋아하는 모든 분들이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라며 “앞으로도 장애인들이 대회에 참여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하는 등 대회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전국 최고의 지역 마라톤 축제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