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하니 대통령, 유엔 총회서 “미국과 즉시 협상할 준비”… ‘가시적인 핵 조치’가 관건
지난 17일(현지시간)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대변인실이 짧은 성명을 하나 내놨다. “외국과의 핵협상 책임을 외교부에 이관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8월4일 로하니 대통령 취임 뒤 서방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긴 했지만, 핵협상을 외교부로 옮긴다는 것은 미국도 기대하지 않은 조치였다.
그리고 24일 로하니는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과 즉시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68차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하며 땀을 닦고 있다. 국제 외교무대에 첫선을 보인 로하니는 이날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뉴욕 | AP연합뉴스
외신들은 “이번 유엔 총회의 중심무대에는 로하니가 있다”며 이란 새 정권의 행보를 예측하기 바쁘다. 기대했던 미국과 이란 정상 간 ‘34년 만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대치해온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모멘텀이 만들어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1990년대 이란 개혁파 정권 당시에 미국 빌 클린턴 정권이 일시적으로 관계 개선을 추진했지만, 2005년 이란에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개혁파라기보다 중도온건 성향으로 분류되는 로하니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적극적으로 엉킨 매듭들을 풀 수 있을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핵문제 외에도 시리아 사태, 이스라엘과의 관계, 민주화 문제 등 이슈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핵문제에서 이란은 최소한 겉으로는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이전까지 핵협상은 강경파에 장악된 최고국가안보위원회가 주관해왔다.앞으로 핵협상을 맡을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은 미국 유학파로, 생애의 거의 절반을 미국에서 보냈다. 2002~2007년 유엔 주재 대사로 일하며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 척 헤이글 국방장관 등과 인맥을 쌓았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수전 멀로니는 “1979년 이래 처음으로 미국과 친한 인사가 이란 외교를 맡았다”고 평했다. 자리프의 측근인 이란의 전직 외교관 사데그 하라지는 “이란은 이제 핵협상을 안보 문제가 아닌 정치·외교 이슈로 본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핵협상권 이관 성명이 나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자리프와 벌써 접촉했다”고 밝혔다. 이번 유엔 총회에서 자리프는 독일 귀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을 만나 핵협상 재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도 서방과의 관계를 푸는 데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하메네이의 뜻을 전달해온 일간지 카이한 등 보수언론들은 협상권을 외교부로 옮긴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전하거나 아예 침묵했다. 하메네이는 지난 17일 정예부대 혁명수비대 앞에서 “어느 나라도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되며, 이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미 핵무기를 가진 강국들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로하니의 협상론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으로 분석됐다.

관건은 이란이 핵 의혹을 풀기 위해 ‘가시적인’ 조치를 내놓는 것이다. 독일 슈피겔은 앞서 이란이 테헤란 남부 포르도의 우라늄 농축시설 가동 중단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다만 로하니는 자국 내 강경파에 급진적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번 유엔 총회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을 거부한 것도 로하니 측이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핵문제에서도 ‘메시지는 강력하게, 행동은 신중하게’ 하면서 줄타기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손을 내미는 목적은 명확하다.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것이다. 오랜 제재로 이란 경제는 몹시 망가져 있다. 로하니는 유엔 연설에서도 “경제제재는 폭력적인 처사”라고 맹비난했다. 미국이 제재 완화라는 당근을 주지 않는다면 로하니가 자국 내에서 지지기반을 잃을 위험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