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고 조남홍 감독 부인 서순애씨
30년 가까이 선수 합숙 뒷바라지
전은회 등 100명이 한국 대표선수
서울 만리동고개에 있는 배문고등학교 육상부 숙소에는 무시로 ‘밥’을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어머니, ‘배문 밥’이 먹고 싶어요. 가도 되지요.”
‘어머니’는 서순애씨(50)다. 배문고 육상부 조남홍 감독(50)의 부인이다.
‘어머니의 밥’을 찾는 아이들은 그곳을 거쳐간 선수들이다. 서씨가 삼시 세 끼 해준 밥을 먹고 한국 마라톤 꿈나무로 성장한 선수들이다. 배문고 육상부는 장거리·마라톤 국내 최강팀이다. 경향신문이 주최하는 대통령기 마라톤대회에서 단골로 우승을 차지했다.
배문고 육상부 조남홍 감독(왼쪽)이 서울 용산구 배문고 숙소에서 30년 가까이 선수들에게 밥을 해준 부인 서순애씨 어깨를 다독이며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서씨는 1986년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마라톤 꿈나무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배문고뿐 아니라 배문중학교와 인근 청파초등학교 아이들에 코치들까지 포함하면 30여명이 밥상머리에 모인다.
“전임자인 황규훈 감독이 건국대로 가시면서 ‘사람 구할 때까지 사흘만 도와달라’고 해서 밥을 해주기 시작했지요. 남편도 스승인 황 감독 밑에서 사모님이 해준 밥을 먹으며 선수생활을 했다고 하더군요.”
배문고 감독 부인의 ‘집밥’ 뒷바라지는 그렇게 대물림됐다.
“신혼살림은 시댁에서 시작했는데 얼마 안돼서 육상팀 숙소 옥탑방으로 옮겼어요. 남편과 왜 안 싸웠겠어요. 젊은 새댁이 ‘밥순이’가 되어버렸잖아요. 보수도 없이, 매일 장보러 다니는 일이 힘들기도 했고요.”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편하고 즐겁기만 한 시절은 아니었다. 서씨는 “정말 짜증나고 힘들 때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면서 “대부분 집을 떠나 육상부 숙소에서 먹고 자던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고 말했다.
해마다 5명쯤 배문고를 졸업했으니 지금까지 150명 정도가 ‘어머니 밥’을 먹고 달렸다. 그중 100명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1만m 한국기록 보유자 전은회, 경주코오롱대회 3연패를 달성한 이서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장신권, 현 고교 랭킹 1·2위인 김태진과 강순복, 지난해 전국랭킹 1위 나현영 등이다. 그래서 육상계에 “마라톤 선수치고 ‘배문 밥’ 안 먹어본 선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다른 학교 육상부도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훈련을 한다. 그런데 식사는 대부분 학교 식당에서 해결한다.
일을 거드는 아주머니 1명과 함께 매일 대식구의 하루 세 끼 식사를 준비하는 서씨는 “조미료는 절대 쓰지 않는다”면서 “성장기 아이들이라서 평소에는 고기류를 많이 먹이는데, 경기 일정이 잡히면 1주일 전부터 식물성 반찬으로 바꾼다”고 전했다.
조 감독은 이곳을 대가족 가정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고교 3년생부터 초등 5·6학년까지 모두 형제처럼 지낸다. 지방에서 스카우트돼 초등학생 때 이곳에 온 김태진과 강순복이 어느덧 고3이 돼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큰형들이 됐다. 조 감독은 “오줌을 지리던 녀석들이 형 노릇하는 걸 보면 운동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나누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서씨는 얼마 후면 또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한다. 졸업하는 아이들 때문이다.
“6~7년 정들었던 아이들이 훌쩍 떠나면 가슴이 텅 비지요. 한동안 마음이 허전해 일도 제대로 못해요.”
떠났던 아이들이 이따금씩 집에 돌아오면 무척이나 반갑다. 서씨는 “어머니 밥 먹고 싶어요”라는 전화를 받으면 언제든지 “얼른 오라”고 한다. 후배들과 함께 밥 한 그릇 먹고 나서 다시 힘차게 뛰어나가는 졸업생들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육상 경기장이나 마라톤대회에 구경 나가면 여기저기서 다 큰 녀석들이 달려와서 제게 안겨요. 그때가 기분이 제일 좋지요.”
가슴 아플 때도 있었다. 20여년간 국내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배문고에 대한 악담, 그중에서도 ‘배문 밥’에 대한 험담 때문이다. ‘밥에 약을 타 먹여서 아이들이 잘 뛴다’ ‘밥도 제대로 안 주고 훈련시킨다’ ‘밥을 돼지처럼 먹인다’는 얘기가 들렸을 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잘나가는 배문고 육상부를 시기해 누군가 퍼뜨린 헛소문이었다. 서씨는 웃으면서 “지금은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대단한 보살핌과 배려가 있어야 자라는 것은 아니다. 숨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내미는 따뜻한 손길 하나로도 얼마든지 반듯하게 성장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새벽바람에 일어나 찬물에 쌀 씻어 따뜻하게 지어준 서씨의 밥 한 그릇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