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임당, 하이테크놀로지를 만나다…김세서리아 지음 | 돌베개 | 179쪽 | 1만원
조선시대에 빨래는 중노동이었다. 여성들은 해가 중천에 뜰 때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시냇가로 나가 저녁 어스름에 돌아왔다. 주무르고 헹구고 두드리는 일을 해도 빨래는 끝나지 않는다. 집에선 화로를 피우고 인두를 달구어 풀을 먹이며 다림질을 해야 했다. 빨래는 그저 중노동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했다. 이덕무의 <사소절>엔 “남자의 옷이 빨았는데도 때가 남아 있는 건 다 부인의 책임”이라고 씌어 있다. 이덕무는 “베를 다리기를 매미 날개와 같이 아늘아늘하게 하는 것은 사치를 위함이 아니다. 그것이 곧 부녀자의 공들임”이라고 했다. 저자는 “(빨래의 고달픈 과정을 되풀이한 것은) 공을 들이는 과정을 통해 부덕이 온전히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달픔은 공들임의 척도로 찬양되었고 그만큼 여성들의 수고는 커져만 갔다”고 말한다.
요즘 빨래? ‘버블샷’이니 ‘터보샷’ 같은 기능에 “세탁기 좀 돌려주겠니”라고 말하면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작동하는 세탁기까지 등장했다. 세탁기는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해방시킨 대표적인 기계로 꼽힌다. 세탁기 광고를 보면, 여성은 편안함을 누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과연 세탁기가 여성을 중노동에서 해방시켰을까. 저자는 “세탁기의 발명을 비롯한 가사노동의 기술화는 여성으로 하여금 힘든 육체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한다.
![[책과 삶]세탁기·청소기가 있어도 여성의 가사시간 ‘불변의 법칙’… 첨단 기술이 발달하여도 변하지 않을 ‘현모양처의 굴레’](https://img.khan.co.kr/news/2014/01/10/l_2014011101001507700120331.jpg)
최첨단 세탁기에 빨래는 누가 넣나. 건조대에 널고 개고 다림질하는 것도 여전히 여성이 감당해야 할 노동이다. 기계 작동법을 익히고 고장 나면 수리까지 맡아야 한다. 게다가 현대에는 위생 관념이 강화되면서 세탁 횟수 자체가 늘었다. 남성들이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빈도가 증가했지만, 여성을 해방시킬 정도는 아니다. 남성들의 몫은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데 머물러 있다. 미국 사회학자 조안 배낵은 <가사노동에 투여된 시간>이라는 논문에서 과학기술의 발전과 가사기술의 과학화가 비록 몇 가지 개별적 가사노동들 사이에서 시간의 재배치를 이루어냈지만, 이 기간에 전업주부가 가사노동에 투입한 시간의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시스템 키친이 들어서면서 여성들은 가전제품 관리에다 청결과 위생이라는 새로운 기준까지 충족시켜야 한다.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여성의 일이다. 저자는 “성 분업은 소멸되기보다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기계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여성이 하는 일을 축소, 은폐시키고 여성이 세탁을 기계에 맡겨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고 여기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테크놀로지 발전이 가사노동의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렸으면서도 전통 여성에게 ‘부공(婦工)’이란 이름으로 부과됐던 노동의 억압적 속성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책은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던 억압적인 노동이 기술 개발로 사라질 수 있었다는 거짓 믿음을 폭로하려고 한다. 결론을 말하면, “과학기술 발달이 여성과 인간의 억압적 지위를 해방하는 데에 전적으로 기여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마치 유가철학 안에서 페미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만큼이나 지나친 일”이다. 저자는 전통 여성 규범과 과학기술을 오가며 이 문제를 파고든다. 저자가 표제로 삼은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전통적 현모양처와 주체적 여성을 둘 다 담아내는 상징이다. 저자는 “‘하이테크놀로지를 만난 신사임당’은 분명 성적 차별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선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억압적인 상황 속에 남겨져 있다”고 말한다. 여성이라는 성 역할이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만난 결과, 둘의 관계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유교 경전인 <주례(周禮)>에서 말하는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 등 ‘부녀사덕(婦女四德)’에 기반을 둔 네 범주로 나눠 살핀다. 앞서 본 게 ‘부공’ 즉 ‘여성의 일과 기술’이다.
‘부덕’은 “정숙하고 우아하고 곧고 얌전하고 절개를 지키고 온갖 행동에 법도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저자는 부덕을 모성과 생식 테크놀로지와 연결시켜 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중요한 과업은 대를 잇는 것이다.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면 첩이나 양자를 들였고 씨받이나 씨내리까지 두었다. 남근을 상징하는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아들 많은 집의 수저를 얻어 쓰고 아들 많이 낳은 여성의 속옷을 훔쳐다 입는 미신도 횡행했다. 현대에는 남아선호사상이 크게 약화됐고 씨받이를 들이는 일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현대 여성이 임신과 출산의 굴레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기술을 만나 심각한 폐해를 낳은 단적인 예로 초음파 기술을 꼽는다. 이 기술은 태아의 성 감별에 사용되면서 대량의 여아 낙태를 야기한 적이 있다. 불임 여성들이 첨단 생식 테크놀로지에 의지하는 일은 어떤가. 저자는 “불임 해결을 여성성과 모성의 완성으로 강조하면서 생식기술 개발에 치중하는 일은 임신과 출산을 여성의 임무로 보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한다.
“온갖 행실 중에 말을 삼가는 것이 제일 큰 공부니 부디 삼가 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송시열의 <우암선생계녀서>에 나오는 글이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부녀자가 만약 누에 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시서에 힘쓴다면 어찌 옳겠는가”라고 했다. 이황은 시를 아름답게 쓰는 것을 기생의 일로 여겼다. 유교 전통 사회는 여성의 말과 글을 억압하며 “때에 알맞고 좋은 말만 가려 말하는” ‘부언’을 강요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이 침묵할 일은 없어진 듯하다. 특히 전화기가 발명된 이후 여성들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매개체로 적극 활용했다. 이 ‘수다’에 대해 사회는 관대해졌다. 요즘 휴대전화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공간을 확장한다. 또 여성의 생활 영역에서 벌어지는 경험, 사건, 느낌을 즐겁게 이야기하는 매개가 됐다. 저자는 그러나 현대의 전화 이용에서 수행되는 언어가 여성들로 하여금 기존에 지녀왔던 성 정체성에 머물도록 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와 여성의 관계는 종종 휴대전화로 직장 일과 가사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슈퍼맘의 이미지로 정착된다.
저자는 ‘부용’ 장에서 현대 사회의 권력, 규율, 여성의 몸 문제를 다룬다. 최근 얼굴 성형, 지방흡입 수술, 유방 확대 수술에 대한 긍정적인 담론의 이면에 작동하는 문제를 지적한다. 성형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선풍기 아줌마’에 대한 주목은 예뻐지겠다는 일념에 부합하지 못한 ‘잘못된 성형’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그 안에는 제대로 된 전문적 성형 기술을 과시하는 풍조와 좋은 성형-나쁜 성형, 전문 기술-사이비 기술을 이분하여 보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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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첨단 기술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의식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형태의 현모양처, ‘테크노 부녀사덕’이 양산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의 억압을 자본주의 문제로 확장한다. 여성은 고급 외제차를 소유하고 운전할 수 있지만, 시간이 자본으로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속도’, ‘빠름’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잠정·유사 자본만을 소유할 뿐이며 이조차도 자본과 권력을 가진 남성을 배후에 두어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게다가 저소득층 여성들은 빠름이 대변하는 기계-남성-자본의 연결 문화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렇다면 남성은, 인류는 해방되었는가. 저자는 기술 발달이 인류의 노동을 절감시켰는지도 다시 생각할 일이라고 했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생산력 향상은 주로 자본가의 이익을 충족시킨다. 기술은 인간 억압을 끝내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기술이 주는 일시적, 부분적인 혜택 때문에 지속되는 불평등을 깨닫지 못할 때도 많다. 저자는 “발전된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은 기술을 통한 지배 계급의 세력 유지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 공포·애호증을 벗어나는 페미니즘의 ‘제3의 길’
![[책과 삶]세탁기·청소기가 있어도 여성의 가사시간 ‘불변의 법칙’… 첨단 기술이 발달하여도 변하지 않을 ‘현모양처의 굴레’](https://img.khan.co.kr/news/2014/01/10/l_2014011101001507700120332.jpg)
여성과 과학기술의 문제를 다룬 최근 저서는 런던정치경제대 젠더 연구소 교수 주디 와이즈먼의 <테크노페미니즘>(궁리·2009)이다. <신사임당, 하이테크놀로지를 만나다>(김세서리아·돌베개)의 핵심 쟁점을 심화해 볼 수 있다.
와이즈먼은 책에서 과학기술과 페미니즘의 여러 논쟁을 소개한다. 기술이 여성의 미래에 유토피아적 전망을 갖게 하는지,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갖게 하는지를 두고 벌인 논쟁들이다. 여성 운동 초기에는 생식 기술을 진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여성 억압을 지배하는 ‘생식의 횡포’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효율적 피임 및 출산 기술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해방의 관건이 인공 자궁에 있다고 여겼다.
파이어스톤의 견해는 공감을 크게 얻지 못했다. 급진적 페미니즘, 문화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은 “서구 기술 그 자체가 가부장적인 가치를 구현하며, 기술 프로젝트가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목표로 한다”는 논리로 이를 반박했다. ‘생식과 유전공학에 저항하는 국제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같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신체가 가부장적으로 착취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에게 체외 수정, 난자 기증, 성 감별, 배아 발달 기술은 강력한 사회 통제 수단을 의미했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군사 기술과 다른 현대 기술의 생태적 효과를 폭력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산물로 봤다.
인터넷 사이버 공간을 두고도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사이버페미니즘은 여성의 능동성, 주체성을 강조하며 유토피아적 관점을 만들어냈다. 디지털 혁명이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력을 포함하는 권력 기반의 쇠퇴를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가상 현실은 낡은 사회 관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공간이다. 전통적 젠더 역할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해방과 자유의 장소라고 본다. 그러나 와이즈먼은 사이버페미니즘의 등장을 긍정하면서도 비판했다. 군사적 기원을 가진 인터넷은 다국적 기업, 금융 시장, 지구화된 범죄 네트워크, 군사전략가, 국제인종주의자의 사회적 규제나 정치적 통제를 피하면서 경제 권력을 집중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전자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과 통제에서도 극심한 성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와이즈먼은 “포르노 웹 사이트가 급성장하고 있는 것을 통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기업들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덕에 많은 업무를 해외로 이동시켜 개발도상국가의 값싼 여성 노동력들을 착취하는 문제도 지적했다. 가정의 기계화가 여성이 가사 업무에 사용하는 시간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키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하게 다룬다. 1997년 한국에도 번역된 루스 슈워츠 카원의 <과학기술과 가사 노동>의 중심 주제는 가사 노동을 없애기 위한 ‘가정 내 산업 혁명’의 실패였다.
와이즈먼은 페미니즘의 기술 공포증과 기술 애호증을 벗어나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즉 기술을 고정 불변의 것으로 보는 기존 페미니즘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기술을 사회 과정으로 보는 관점을 도입할 것을 강조한다. <테크노페미니즘>은 과학기술과 페미니즘 논의에 정보통신 기술, 생명공학 기술에 대한 기술사회학적 분석도 포함시킨다. 와이즈먼의 전작은 <페미니즘과 기술>(당대·2001)이다. 성 차별의 위계 구조가 기술의 설계, 발달, 확산 그리고 사용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