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캄보디아 한국공장에선 무슨 일이
캄보디아 프놈펜의 의류산업단지에 있는 한국·미국계 기업 약진통상의 공장부지는 911 공수부대 베이스캠프와 이웃해 있다. 지난 2일 공수부대는 정문 밖에서 파업을 독려하는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그중 일부를 약진통상 부지 안으로 끌고 들어가, 공장과 군 기지 사이에 난 쪽문을 통해 베이스캠프로 연행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공수부대원이 시위자를 약진통상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본 일부 사람들은 “체포된 시위자들이 약진통상 안에 구금돼 있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약진통상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것은 이 회사의 노동조건이 다른 기업들에 비해 특별히 열악해서도 아니었고, 이 공장 노동자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캄보디아 당국이 ‘이례적으로’ 이 공장 앞에서 파업을 부추기는 시위대를 해산한다며 군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프놈펜포스트 등은 “한국 기업을 지키기 위해 군까지 투입한 이유가 무엇이냐”며 캄보디아 정부를 상대로 따져 물었다.
지난 3일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시위가 과격해지고 결국 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숨진 데에 ‘공수부대 투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보고 있다. 유혈사태는 지난해 치러진 총선 부정선거 시비를 둘러싼 캄보디아 야당의 시위와 이로 인한 정정불안, 물가 상승에 항의하며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 속에서 벌어졌을 뿐 한국 기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는 아니었으나, 군 투입과 함께 한국 기업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 인터넷매체 글로벌포스트, 호주 ABC방송 등은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 웹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토대로 “한국 정부가 요청해 캄보디아 측이 공수부대를 개입시켰다”고 보도했다.

“파업 말라” 경고문 약진통상 프놈펜 공장 부근에 15일 캄보디아 노동부 장관 명의의 공문이 붙어 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내용이다. | 아시아다국적기업감시네트워크 제공
▲ “작업 복귀하면 하루 5달러·쌀 한봉지 주겠다고 회유”
한국 기업 일부 책임론에 대사관·기업들 강력 반발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국제민주연대 등 한국의 인권·시민단체들도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와 시민, 심지어 승려가 참여한 평화시위임에도 한국대사관과 기업의 요청으로 군대가 동원됐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이 나흘 후인 27일 캄보디아 고위 당국자들에게 파업사태를 해결할 것을 요청했고, 그 사흘 뒤에는 캄보디아 법무부 등에 한국기업의 보호를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발송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군경의 근로자 시위 유혈진압과 관련해 현지 한국대사관과 기업들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대사관과 기업들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 5일 공식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대사 명의로 훈센 총리에게 서한을 보냈고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해 우려를 전달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사관 측은 사흘 뒤 “불필요한 오해를 막겠다”며 관련 글을 삭제했다. 대사관 측은 캄보디아에 기업이 나와 있는 중국, 일본 등 타국 공관들도 캄보디아 정부에 비슷한 요청을 했다고 해명했다.
아직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고, 아시아다국적기업감시네트워크 등 국제기구들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국제민주연대를 비롯한 네트워크 소속 단체들은 15일부터 현지조사단을 파견해 노동자 증언들을 청취하며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단은 공장 주변을 둘러보고 군부대와의 거리, 지형 등을 살폈지만 공장 부지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이 얘기한 ‘공장과 군 사이의 쪽문’도 증언을 통해서만 들었을 뿐이다. 조사단은 현지 노조단체를 통해 약진통상의 노조원들과 접촉, ‘익명’을 전제로 4명의 노동자로부터 공수부대가 회사 앞에 왔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수집했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군부대가 공장 측과 평소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아티(가명)는 “공수부대의 고위직 관료가 약진통상의 창고 관리자로 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조사단의 사전 서면질의에서나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군부대 요청설’을 강력 부인했다. 약진통상 관계자의 말처럼 “일개 기업이 파업을 막기 위해 공수부대의 출동을 요청한다는 것은 캄보디아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사측에서 공수부대의 출동을 요청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확산됐다. 한국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카나디아 공단 곳곳에 군인들이 질서유지를 명분으로 진을 치면서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약진통상 측은 자사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으나 노동자 아티는 자신이 바로 파업 중이던 수많은 노동자 중 한명이었다면서 “공수부대가 직접 개입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전에도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둘러보고 가곤 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또 사측이 이 사태 뒤 회유에 나서고 있다고 말한다. 아티는 “사측이 몇몇 노동자들에게 ‘파업에서 빠져나와 작업에 참여하면 하루에 5달러와 쌀 한 봉지를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강경진압에 겁먹은 노동자 50~200명은 대열에서 빠져나와 업무로 돌아갔다. 파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지금은 대부분 업무 현장으로 복귀한 상태다. 아티는 “현장 복귀율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사측은 5달러에서 1달러로 당근 액수를 줄였고, 쌀봉지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회사는 다시 정상 가동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복귀된 것은 아니다. 조사단의 증언청취에 응한 노동자 아티는 “정부와 사측의 압박이 두렵지만 그럼에도 나는 증언을 하고 싶다”며 “공수부대와 아무런 친분이 없다는 사측의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한국대사관과 회사 등을 상대로도 질의와 조사를 계속할 계획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한국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한국 의류업체의 필리핀 사업장이 노조 탄압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고, 2010년에는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영원무역 의류공장에서 노동자 폭행·감금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교훈’을 얻어온 서방의 다국적 의류기업들이나 소매체인들은 동남아시아 사업장에서 노동이슈가 불거지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고 있다. 현지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방 시장의 소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방글라데시 다카 외곽 사바르에서 공장붕괴 참사가 일어났을 때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일제히 나서서 현지 노동조건 개선에 함께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