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 노동’ 한계에 부딪힌 동남아

“원·하청사, 노동자 옥죄기보다 현실 인정하고 대안 모색해야”

정유진 기자

정유진 기자 프놈펜 4신 - 외면 못할 캄보디아 현실

나흘간 캄보디아에서 만난 의류산업 종사자들은 저마다 “이대로는 못 산다”고 말했다. 한국 봉제업체들은 임금을 올려주면 수주 경쟁에서 밀려 도산할 판이라며 “우리는 불법파업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모두가 피해자라면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선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한 한국·미국계기업 약진통상 노동자들이 15일 공장 부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프놈펜 | 정유진 기자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한 한국·미국계기업 약진통상 노동자들이 15일 공장 부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프놈펜 | 정유진 기자

▲ 고물가 탓 실질임금 2001년보다 낮아
유엔 인권보고관, 발포 책임자 조사 촉구
“한국회사 손배 청구 반인권적” 비판도

공장에서 10년을 일했지만 남은 것은 200달러의 빚뿐이라는 여공 롬 파비(31)가 최저임금 인상 시위에 나선 것은 “나도 ‘꿈’이란 것을 가져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공장 운영이 힘들어진다는 업체들의 주장 역시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글로벌 의류산업은 동남아 저임금 노동자-현지 하청업체-유명 브랜드의 먹이사슬 구조로 이뤄져 있다. 월마트, 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 업체들은 막강한 구매력을 앞세워 가장 싼 납품가를 제시하는 하청업체에 수주를 준다. 가원어패럴 차경희 대표는 16일 “캄보디아의 국내총생산(GDP)을 고려했을 때 이미 충분한 임금을 주고 있다”고도 했다.

국제노동기구(ILO) 산하 ‘베터 팩토리즈 캄보디아(BFC)’의 제이슨 주드 담당관을 만나 양측의 주장을 들어봤다. 그는 공장주들의 하소연에 대해 “운영난에 처하는 일부 기업이 생겨날 수는 있겠지만, 사실이 아닌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ILO 통계를 보면, 캄보디아의 실질임금은 2001년보다 낮은 수준이다. 최저임금이 80달러에서 100달러로 인상되면 간신히 2001년보다 조금 나아진다. 그나마 전국 물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봉제공장이 몰려 있는 프놈펜의 물가는 훨씬 높다. 그래서 노조들은 160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한다. 주드 담당관은 “캄보디아보다 최저임금이 낮은 나라는 이제 미얀마와 방글라데시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 브랜드와 하청업체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수익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야 하며, 이는 기업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유혈진압 과정은 유엔에서도 문제 삼고 있다. 수르야 수베디 유엔 캄보디아 인권특별보고관은 16일 발포 책임자와 군·경찰에 대한 조사를 할 것을 당국에 촉구했다. 지난 3일 노동자 5명이 숨지고 30여명이 다친 뒤 유엔이 직접 조사를 촉구한 것은 처음이다. 수베디 보고관 지적대로, 캄보디아 정부의 무능과 반노동적인 태도는 사태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태도는 한국의 사회적 윤리의식 수준을 드러냈다. 일부 한국 봉제업체들은 노조와 야당 지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주드 담당관은 “파업한 노조에 대해 손배소를 제기하는 것은 ILO 조약에 어긋난 반인권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방글라데시에서 공장이 무너져 1000여명이 숨진 뒤 미국과 유럽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산된 의류를 거부하고 의류업체와 공장들을 감시하자는 소비자 운동이 벌어졌다. 맷 데이먼 등 미국의 유명 인사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내세운 ‘제2의 산업혁명’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투자하기도 했다. 과거 식료품류가 주를 이루던 공정무역 박람회에서 의류 상품이 늘었다는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외국 노동자들보다 한국 기업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우세하다. 또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의 연대의식도 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주드 담당관은 “유럽과 미국의 유명 기업들은 하청업체를 선택하기 전 반드시 ILO에 노동환경과 인권 상황에 대해 자문을 한다”면서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 기업들은 한번도 연락을 해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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