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시작부터 어지러웠다. 한 언론사가 느닷없이 ‘통일이 미래다’라고 소리칠 때부터였다. 평소 남북화해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게 아닌가 생각했던 그들이다. 통일은 평화통일뿐이라 믿었기에 갑작스러운 그들의 구호가 커밍아웃인지, 다른 무엇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감 후]도둑처럼 찾아온 통일론](https://img.khan.co.kr/news/2014/02/06/l_2014020701000807400071272.jpg)
대통령의 신년회견으로 어지럼증은 더 심해졌다. “통일은 대박”이란다. 통일과 대박, 상상도 못한 조어였다. 강경한 대북 원칙론으로 한반도만 얼어붙게 하는 것 아닐까 걱정했던 그 분이 맞나 싶었다. 이들의 너무도 느닷없는 동조현상에 짜고 나온 건 아닌가 의심도 했다. 지난 대선에서 한배를 탄 것처럼 밀고 끌어주던 그들이기에 의심은 더했다.
대통령의 ‘통일 대박’ 이후 우리 사회는, 적어도 여권은 온통 통일 이야기다. 북한 인권 외엔 관심없어 보이던 집권 여당엔 통일연구센터와 통일경제교실이 등장했다. ‘통일이 미래’라는 그 언론사는 ‘대박론’을 이어받아 연일 통일의 경제적 효과를 선전하기 바쁘다. 왠지 현기증을 참으며 이 흐름에 동승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마저 든다. ‘통일은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했다지만, 적어도 통일론이 도둑처럼 갑자기 우리 앞에 뚝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가슴이 턱 막힌다. 잊었던 어릴 적 영상이 떠오르면서다. 손 모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던 그 시절이다. 그러면서 해마다 매미가 울 무렵이면 뿔이 난 도깨비 포스터와 ‘때려잡자’는 표어로 애국심을 증거하던 때다. 그땐 그게 모순인지도 몰랐다. 통일하자면서 ‘때려잡자’면 어떻게 통일하자는 것일까.
지금 도둑처럼 찾아온 통일론도 그때처럼 비어 있긴 마찬가지다. ‘통일’이란 구호만 있다. 투기심리를 건드리는 ‘대박’이 더해진 정도가 차이일까. 과거 통일론이 운명이란 식의 추상이라면 이제 실리적 당위를 더한 과학인가.
물론 어떤 통일을 따지는 것은 다음 문제일지 모른다. 북한 붕괴를 가정한 위험한 ‘흡수통일’이 아니냐는 의심은 일단 제쳐두자. 분단이 외세에 의존한 때문인 것처럼 다시 외세의 압박에 기대는 통일이 아니냐는 우려도 접어두자. 통일을 우리 사회 의제로 공감하는 것만 해도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관심에서 멀어져 가던 ‘분단’이란 모순의 해소를 미래비전으로 매김시킨 것이 아닌가. 야당 대표조차 ‘통일시대준비위’를 제안하며 화답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지울 수 없는 불안은 하나 남는다. 느닷없는 통일론 이면의 국내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의심이다. 갑작스러운 통일론으로 한동안 진보의 전유물 같던 통일론이 갑자기 ‘보수’ 의제로 자리이동한 효과는 확연하다. 실상 보수진영 입장에선 향후 집권비전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마주한다면 막막했을 것 같다. 지난해 대선에서 복지, 경제민주화, 통합 등 시대정신이란 것은 죄다, 심지어 야권 의제까지 빌려 쓰고도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린 마당이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대선을 지배한 정신은 통합이었다. 패권적인 지역·이념의 통합만이 아닌 격차·계층의 통합이 제대로 중심에 놓였다. 복지, 경제민주화는 그런 계층 통합 노력의 상징이다.
혹여 지금 이 빈칸의 통일론이 ‘통합’을 ‘통일’로 바꿔치는 정치전략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란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서문에서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전략으로서 통일론은 안그래도 불안한 한반도 양쪽에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의 불씨를 심는 꼴이 될 것이다. 민족의 명운과 안전은 결코 정치적으로 사유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 점에서 외교·안보 부처들이 6일 ‘평화통일’에 맞춘 업무보고를 내놓은 것은 다행스럽다. 빈칸을 채우는 출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통일 대박’에 코드를 맞춘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