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이장님의 목소리가 퍼진다. “아, 아, 주민 여러분. 농사일에 수고가 많습니다. 오늘 저녁 7시에 ○○국민학교에서 영화 상영이 있습니다.”
읍내에조차 극장이 거의 없던 60년대와 70년대. 시골마을을 가끔 찾아오는 이동극장은 귀하디 귀한 문화 향유의 시간이었다. 당시 제대로 된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졸업이나 생일 때 한번 맛을 보는 자장면만큼이나 호사였다.
영화는 영사기가 만들어낸 빛의 그림자였지만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이순신 장군의 충성심과 돌아온 외팔이의 정의와 의리가 있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산업화로 무너져가던 가부장의 권위가 나뒹굴기도 했다. 어른들은 영화가 끝나면 ‘에이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될려고…’ 하며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형님과 누나들, 그리고 우리 또래들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수입된 외국 영화들은 더 큰 문화충격을 주었다. 찰턴 헤스턴과 율 브리너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수탈사를 증거했고,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의 사랑 속에서 남북전쟁의 실상을 엿볼 수 있었다. 또 존 웨인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서부개척이 잔인한 인디언 학살사임을 증명해 주었다. 무엇보다 우리 또래들이 가장 많이 공감했던 건 제임스 딘이었다. 그는 저항과 반항의 아이콘으로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던 우리를 설레게 했다. 영화는 이처럼 문화의 한 장르라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윈도였다.
하지만 영화는 TV의 급속한 보급으로 위축되어 갔다. 특히 컬러TV가 도입되면서 대중문화의 선도적 역할을 TV에 내주고 말았다. 그러기를 20여년. 영화가 다시 대중의 곁으로 돌아왔다. TV의 지나친 상업주의에 식상한 대중들이 영화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해 국내 영화 관람객은 2억명을 넘어섰고 1000만명의 영화도 속출하고 있다. 바야흐로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이는 곧 그만큼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영화를 둘러싼 불편한 시선들이 눈에 띈다. 불편한 시선의 중심에는 TV의 공공성을 훼손한 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국내 영화관은 90% 이상이 3개 대기업 계열사의 소유다. 이들은 제작, 배급, 상영권 등 영화시장의 3대 요소를 독차지한 문화권력이다. 정치·경제 권력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철저한 상업성으로 무장해 급기야 대중의 영화 선택권마저 제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해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개봉을 좌절시키더니 최근에는 노동자의 죽음을 둘러싼 상업영화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2500개가 넘는 스크린 중 이 영화에 내준 스크린은 겨우 100여개에 불과하다. 그나마 변두리 지역에다 상영시간도 들쭉날쭉하다. 이 영화를 볼려면 다리품도 팔고 일찍 서둘러야 한다. 마치 이 땅의 노동자를 대하는 자본의 시각과 닮아 있다. 또 민주화 투쟁 시절 대학생과 시민들을 변두리 지역에 부려놓았던 그때 그 장면과 겹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홀대나 담합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억지와 항변이 결코 낯설지 않음을 발견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이명박 정권은 4대강 등 국정운영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 아니라고 발뺌했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모든 것을 자신들의 뜻대로 했다. 박근혜 정권은 어떤가. 1년여 동안 단 한차례도 대중들의 요구에, 의혹에 대해 시원스럽게 응대해 주지 않았다. 그런 정권의 행태를 옆에서 지켜본 자본이 무엇을 배웠을까. 그래서 자본은 지금 대중을 향해 영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담대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말이다. 장마철 저수지의 둑이 그나마 견디는 것은 곁수로로 흘려보내는 작은 양의 물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자유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은 이 곁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것과 같다. 불통과 독선, 일방통행식 권력집단의 횡포시대에 대중들은 영화를 통해서나마 세월의 아픔과 힘겨움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비록 대나무 장대에 흰 천을 두른 스크린, 의자도 없는 멍석 위에서였지만 이동극장은 이념과 나이, 성별, 신분에 구별없이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었다. 문화평등으로 따뜻했던 그날 한여름 밤이 새삼 그리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