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인류의 진보를 믿는 휴머니즘은 ‘환상’에 불과

서영찬 기자

▲ 동물들의 침묵…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 | 이후 | 272쪽 | 1만6000원

인간의 악은 일종의 오류이며 지식이 발전하면 이 오류도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이성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 인간의 문제에서 장기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믿음, 인간은 자유를 사랑하는 존재라는 믿음. 서구 휴머니즘을 떠받치는 신념들이다. 이 신념들의 기저에는 인간은 진보한다는 사고가 똬리 틀고 있다. 낭만주의, 계몽주의, 자본주의는 물론 진화론과 공산주의도 이 점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다.

[책과 삶]인류의 진보를 믿는 휴머니즘은 ‘환상’에 불과

저자에 따르면 현대 휴머니스트는 진보라는 개념을 불러내면서 두 개의 신화를 합쳤다. 하나는 그리스 철학에서 발원한 ‘이성’이라는 신화, 다른 하나는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화이다. 신화란 것이 불멸이듯 진보에 대한 신념도 진리로서 세대를 넘어 영속했다. 하지만 저자는 진보에 대한 믿음은 망상이고 ‘더 나은 삶’은 환상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유럽 제국주의와 두 번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쟁에서 목격된 것은 인간의 야만성과 비이성이었다. 더 많은 자유를 위해 촉발된 수많은 혁명들의 종착지도 폐허와 절망이었다. 모두 진보와 거리가 멀다. 저자는 스테판 츠바이크, 아서 쾨슬러 등 유럽 지성인들의 경험과 조지프 콘래드, 조지 오웰 등의 글을 통해 진보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들춰낸다. 진보는 환상이고 삶은 폐허라는 절감은 많은 유럽 지성인을 자살로 몰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머니스트는 진보를 맹신한다. 어느새 진보는 신화가 됐고 삶의 핵심적 상징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휴머니스트는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들은 비행접시를 쫓아다니는 사람이나 종말론에 빠진 광신도와 다를 바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휴머니스트의 단면을 잘 간파한 ‘물고기 철학자’ 비유가 있다.

“물고기 철학자들은 물고기의 골격을 보면 손발에 해당하는 부위를 다리와 날개로 발달시키는 경향성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서 완전히 쓸모없는 작은 뼈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다리와 날개를 암시하는 증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하늘을 나는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물고기종이 날기를 열망할 뿐 아니라 때로는 실제로 날 수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러시아 사상가 알렉산더 헤르첸의 글인데 진보와 이성을 신봉하는 휴머니스트의 속성을 꼬집는다.

저자는 물고기 철학자의 대표격으로 <자유론>을 쓴 스튜어트 밀을 꼽는다. 서구 자유주의 문명은 그의 사상을 주춧돌로 세워졌다. 하지만 저자는 서구 문명은 꿈 위에 세워졌다고 비판한다. 허상이라는 뜻이다.

책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애시당초 인간에게 해결책이라는 것은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해결책을 내놓는 일은 진보주의자가 하는 짓이다.

그러나 실마리는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통찰에서 그 일부가 제시된다. 프로이트는 불안정하고 병적인 상태를 ‘정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삶은 혼돈 그 자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휴머니스트의 견해에 반대하는 저자는 동물의 침묵에 주목한다.

침묵은 그 자체로 동물의 삶이다. 숨쉬기와 같다. 인간은 어느 때부터인가 침묵을 수련, 수도 행위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삶에서 멀어졌다. 또 삶이 혼돈과 폐허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더욱더 삶과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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