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학의 세계사…이종찬 지음 | 알마 | 320쪽 | 2만2000원
일본의 난학(蘭學)은 흔히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시대(1603~1867)에 네덜란드로부터 받아들인 서양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무역과 선교를 동시에 추구하던 다른 유럽 제국과 달리,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 네덜란드에만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했고, 이를 통해 서양의 의학·과학 지식이 들어왔다는 게 상식이다. 교역의 중심지는 나가사키 인근 데지마라는 작은 섬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일본이 서양 문물을 소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그간의 연구는 서구 중심적 시각이라고 일축한다. 이 같은 역사 기술은 근대 일본의 형성 과정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네덜란드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열대’를 무대로 네덜란드와 무역을 했고 문화를 교류했다. 여기서 ‘열대’는 현재 필리핀, 캄보디아,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일본은 에도시대가 열리던 17세기 초반부터 이곳에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중국과 더불어 무역 경쟁에 뛰어들었다(지도). 그러면서 남태평양에 대한 지리적 상상력과 함께, 유럽의 식민지배를 본뜬 제국적 욕망을 키워나갔다.
훗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9세기 정치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난학사시(蘭學事始)>에서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지향한다’는 탈아입구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정당성을 찾아냈다. 난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스기타 겐파쿠(1733~1817)의 말년 회고록인 <난학사시>는 18세기 에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난학이 싹트고 발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중화적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려는 ‘탈아론’의 출발점인 셈이다.
이처럼 난학은 근대 일본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근대 일본, 나아가 현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난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난학의 세계사>는 <난학사시>의 한국어 번역문과 저자의 난학 연구인 ‘열대의 일본, 중화적 세계를 넘어 유럽으로’라는 글로 구성돼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난학자들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중화세계와 결별하고 열대 남태평양을 아우르는 상상의 공동체인 ‘대동아’를 설정한다. 유럽을 통해 들어온 지도에서 중국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1582년 교황의 초청으로 일본 최초의 세계여행을 다녀온 ‘덴쇼소년사절단’은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알려진 오르텔리우스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선물로 받아왔는데 이 지도를 펼쳐본 다이묘(지방의 번주)들은 지도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표시돼 있지 않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유럽 서적을 번역함으로써 일본적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센카쿠열도와 독도 분쟁 등 현대 일본이 보이는 행동의 무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 난학과 조선 실학의 차이가 18세기 일본과 조선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본다. 신분 구조가 견고한 조선 사회의 학자들은 사대부의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하급 사무라이가 대부분이던 일본 난학자들은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박물학, 의학, 기술과학에 천착할 수 있었다. 실학자들이 여전히 정전을 고수하는 동안 난학자들은 닭 잡는 방법, 인삼의 생장 과정 등 생활에 직접 와 닿는 책들을 번역했다. 서구 지식의 번역과 인쇄기술 발달이 맞물려 다양한 책들이 출판됐고 교양 독자층이 형성되어 ‘지식의 사회화’가 이뤄졌다. 실학자들이 쓴 책이 확산은커녕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이처럼 난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번역가였다.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단어를 가지고 며칠씩 씨름했다. 중화적 세계관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을 표현하려다 보니 일본식 한자어를 새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난학자들이 중국 한자어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본식 한자어를 새로이 발명해나간 것을 그리스·로마 문명을 번역해 중세 유럽에 전해준 이슬람의 번역 작업에 비견한다. 현재 우리가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인권, 자연, 민주, 평등 등 수많은 개념어들은 사실 일본 난학자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난학사시>의 저자 스기타 겐파쿠의 초상화(이시하라 다로 작, 1812년, 와세다대 도서관 소장).
저자는 난학에 대한 지엽적 해석으로는 난학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다면서 일본-열대 동남아-유럽이라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 속에서 난학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은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게 아니라 일찍이 17세기 초반부터 열대 동남아에서의 무역활동을 통해 유럽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했고, 난학이란 형태로 근대 일본을 형성했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난학사시’ 이해 위해 10년 공부
난학은 현대 일본 이해의 ‘열쇠’
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는 2003년 하버드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동아시아 의학의 전통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일본 의학사를 연구하면서 고전 <해체신서>를 읽었고, 이 과정에서 <난학사시>를 만나게 됐다. 이 교수는 “책을 읽는 순간 바로 한국어로 번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번역과 자신의 글이 함께 실린 <난학의 세계사>가 출판됐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번역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난학사시>가 쓰여졌던 당시의 일본, 난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먼저 열대와 서구를 연구하기로 했다. 2006년 베트남의 호이안, 후예를 시작으로 유럽,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30여개 지역을 탐방했다. 사람들을 만났고 도서관과 박물관의 사료실을 찾아다녔다. 2009년에는 아주대에 열대학연구소도 설립했다. 열대와 서구를 다니다 보니까 번역해놓은 <난학사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별도로 난학을 연구한 글을 썼고 이를 <난학사시> 번역문에 붙여 책을 완성했다.
이 교수는 “난학을 이해하지 않으면 현재 ‘아베의 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중국이 주도하는 ‘중국·태평양 도서국 경제개발협력 포럼’에 맞서 ‘태평양 도서국 포럼’에 아베 총리가 직접 참여하는 등 열대 남태평양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약 50만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이 남태평양 제도에서 죽어간 것을 추모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 교수는 “난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동아’라는 개념은 근대 일본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일본은 남태평양에 대한 영토 인식을 계속 보일 것”이라며 “센카쿠열도 갈등 등으로 중·일 간 갈등은 격화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우리가 난학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근대 일본 정체성의 뿌리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감정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야 일본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은 현실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멀어져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