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포퓰리즘

김광호 정치부 차장

지난 10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는 정부의 주택임대차시장 대책 성토장으로 변했다. “현장을 모른 채 만든 책상머리 정책” 등 분노어린 질책들이 잇달았다. 부동산 임대소득에 대한 과세 방침이 이유였다. 부동산 시장만 위축시키고, 세금은 세입자에게 전가돼 지방선거 여론만 나빠질 것이란 질타였다. 정부로선 지난해 8·8 세제개편안에 이어 다시 조그만 ‘증세안’을 꺼냈다가 호되게 당했다. 이처럼 정치권, 특히 여당은 ‘증세’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마감 후]세금 포퓰리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10월30일 출입기자들과 산행한 후 오찬간담회에서 향후 국정운영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 양반이 또 어떤 ‘폭탄 발언’으로 놀라게 할까. 열변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싱거운 소리 한번 하고 쉬운 수수께끼를 내겠다. (캐나다 총리였던) 멀루니와 마틴, 크레티앙 중 누가 소신있는 지도자인가.”

1991년 브라이언 멀루니 총리는 재정적자 타개를 위해 연방부가세를 도입했다. 이로 인해 169석 과반 여당은 2년 뒤 총선에서 고작 2석으로 처참하게 몰락했다. 당시 장 크레티앙의 자유당은 연방부가세 철폐를 공약으로 내걸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집권 후 공약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폐기해 버렸다. 그 덕분에 1997년 캐나다 재정은 흑자로 바뀌었다.

‘폭탄 발언’ 우려는 야당의 ‘세금폭탄’ 공세로 현실화됐다. 몽땅 그 탓은 아닐 테지만, “철면피 세금 갈취정권”(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과 같은 공격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던지, 노 전 대통령 예언처럼 여당은 8개월여 뒤 지방선거에서 16개 시·도지사 중 단 한 곳을 빼고 모두 패하는 몰살을 당했다.

‘세금폭탄’론 이후 증세는 정치권의 ‘금기’가 돼버렸다. “70여년 동안 성공적인 민주국가 국민들은 대체로 국가의 부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정부 임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부가 재분배를 할 때 쓰는 주된 방법이 바로 세금”(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가능한가>)과 같은 이성(理性)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금 인상’이 아니다. 오늘날 세금은 ‘포퓰리즘’ 그 자체가 됐다. 지금도 여당 내 ‘반증세론자’들은 “복지 하면 나라 망한다”고 하지만, 그 예로 드는 나라의 현실은 다르다. 심심찮게 국가부도 위기설에 휩싸이는 남유럽 국가들을 보면 복지를 해서가 아니다. 세금이 문제였다.

그리스의 조세부담률은 31.2%(2012년 기준)이고, 스페인도 31.6%에 불과하다. 우리의 25.9%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면 소위 북유럽 복지 부국들의 조세부담률은 스웨덴 44.5%, 노르웨이 43.2%, 핀란드 43.4%다. 이들 국가의 재정적자(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도 스웨덴 33.8%, 노르웨이 26.1%, 핀란드 41.7%에 불과하다. 세금으로 복지와 재정건전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다. 반면 스페인과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51.7%, 147.8%에 달한다.

고율의 세금에도 북유럽 국가들의 국가경쟁력은 약하지 않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순위를 보면 핀란드 3위, 스웨덴 6위, 노르웨이 11위로 우리(25위)보다 한참 위다.

이처럼 복지망국론 상징이 된 국가들의 문제는 복지수요는 늘어나는데, 재정은 확보하지 않는 무책임에 있다. 그리고 복지를 세금 포퓰리즘의 방패막이로 삼은 정치권의 교활함에 있다.

걱정은 지금 우리 주위도 세금 포퓰리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역설적 ‘세금 망국’의 늪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거 때마다 정치권은 복지 확대를 약속한다. 하지만 세금 이야기만 나오면 말문은 막힌다. 급기야 여당은 작정하고 공약을 펑크냈다. 적반하장 격으로 “국가재정을 파탄시키자는 거냐”고도 한다. 정치가 세금 앞에서 솔직해져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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