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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방송은 없다

입력 2014.04.06 21:01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골마을에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급히 호롱불을 끄고 아이들 머리 위에 두꺼운 이불을 덮어 씌웠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발자국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이들은 숨을 멈췄고, 아버지는 “누구요”라고 물었다. 순간 플래시 불빛이 아버지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붙였다. 플래시 불빛으로 아버지는 빛 뒤편 발자국의 정체를 알수가 없었다. 그때 발자국이 물었다. “국방군 편이네, 빨치산 편이네?”

[아침을 열며]노인을 위한 방송은 없다

한국전쟁 막바지. 북으로 가지 못한 북한군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국군은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산간마을을 뒤졌다. 낮에는 국군의 땅이었지만 밤에는 산사람들 차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던 그때 부역자를 가려내려는 국군과 산사람들의 속임수도 점점 교묘해져 갔다.

칼날 위의 삶이었다. 한순간 잘못된 선택은 자신과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전후에 태어나 기미가요를 불러야 했고 일본인 선생에게 모진 매를 맞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이번엔 한국전쟁의 한가운데 서야 했다. 그리고 좌우 갈등과 4·19, 5·16, 유신독재와 민주화투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 땅의 노인들이 살아온 인생 역정이다. 언젠가 그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그 세월을 살면서 무엇이 남았겠느냐. 매번 여당 편만 든다고, 국가안정만 앞세운다고 타박하지만 그런 세월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겠느냐. 내 생명을 부지하는 게 첫째고, 자식들 잃어버리지 않고 배불리 먹이는 것이 둘째였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이유고, 종교였다”라는.

그들은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만신창이가 된 논과 밭을 살뜰히 가꿔 곡식을 생산했고, 알뜰한 살림살이로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냈다. 또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을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세계화와 인터넷이라는 생소한 단어들을 이해하기도 전에 IMF와 글로벌 위기라는 또 다른 전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뼈와 살을 흔쾌히 내주었다. 오직 자식들만은 밥먹이겠다는 그 종교를 완성하기 위해 집과 논을 팔았다.

지금 그들은 위험한 비탈에 서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할 정도로 위험한 자세로 서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안쓰럽게 바라볼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약간의 관심만 기울인다면 길은 있다. 노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누굴까? 바로 텔레비전이다. 언젠가 한 할머니가 ‘무엇을 하며 지내세요’라는 질문에 “으~응, 텔레비전 봐. 텔레비전이 자식이고 친구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특히 홀로 됐거나 병상의 노인들은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한다.

하지만 텔레비전도 알고 보면 진정한 친구는 아니다. 소비능력을 갖춘 젊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친구일 뿐이다. 프로그램 대부분은 젊고 잘 생기고 부유한 사람들의 연애담과 얽히고설킨 애증사, 젊음을 내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연예인들의 선정적인 몸짓과 시시덕거리는 말장난 차지다. 노인을 위한 텔레비전 방송은 없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속한 고령화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치매와 질병으로 인한 가정파괴와 동반자살, 고독사 등 차마 인간의 땅이라고 말하기 힘든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고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마저 사그라지게 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노인을 위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프로그램 하나가 고령화 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단 한 시간, 아니 일주일에 몇 시간만이라도 자신들의 삶을 위로받고, 의미를 되돌아보고,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가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침 공공의 삶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됐다는 공영방송 KBS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 중이다. KBS는 수신료 인상을 이번에는 관철시키기 위해 다양한 여론전을 펴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구석인 이 땅의 노인들 삶을 외면한 수신료 인상이 여론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설사 수신료 인상이 관철된다 한들 이미 퇴색해 버린 공영방송의 가치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목련과 벚꽃이 만발한 이 봄날, 시골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는 오늘도 봄밤이 이슥하도록 텔레비전 앞을 지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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