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요깃거리 넘어 첨단·수작업 결합한 ‘작품’
4200개 보석 달린 브래지어 등 액세서리로
국내선 고급화 바람… ‘호텔식 피팅룸’ 등장
“사람들은 섹시함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죄책감을 느낀다. 섹시함, 관능은 인간의 천성이며 나는 천성을 거스르는 것들에 반대한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1946~1997)의 말이다. 그는 여성의 몸매를 최대한 살린 간결한 드레스를 만들었다. 1991년에 제작한 ‘베이비 돌 드레스’는 실크 원단으로 만든 가슴 부위에 레이스를 단 상의와, 실크주름 원단과 레이스의 치마 부분으로 이뤄졌다. 이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베르사체는 이 드레스를 여성 속옷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실용성을 위해 등장한 속옷이 ‘예술’로 승화되는 경우다.
해리엇 워슬리는 저서 <패션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에서 끈팬티(thong)가 고대 영어 ‘thwong’(유연한 가죽끈)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최초 끈팬티가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원시적이고 간단한 의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자이너 루디 건릭이 1970년대 유니섹스 수영복으로 출시했다.
끈팬티는 1980년대 속옷으로 인기를 끌었다. 팬티 라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다. 밑위가 짧은 바지와 내려 있는 힙합 바지가 유행하면서 끈팬티는 아예 ‘드러내놓는’ 패션의 일부가 됐다.
이처럼 속옷은 단순히 이성의 ‘눈요깃거리’만이 아니다. 어떤 제품보다도 정교하고 세심한 작업공정을 거쳐 탄생한다. 의류산업 부문의 하나로서 업체간 경쟁은 어느 분야 못지않게 치열하다. 그래서 속옷은 예술이고, 과학이며, 산업이다.

■ 속옷은 과학이다
속옷은 겉옷보다 크기는 작지만 수십가지의 부자재를 꼼꼼한 수작업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대부분 제조업이 기계화와 전산화되고 있지만 속옷 중에는 일일이 수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제품이 더 많다. 여전히 전문 봉제 담당자들이 수십가지의 분업을 통해 생산하는 ‘노동집약형’ 제품인 셈이다.
여성 속옷의 대표 아이템인 브래지어는 20~30개 자재가 사용된다. 컵과 어깨끈, 어깨끈의 길이를 조절하는 ‘아자스터’, 가슴둘레를 고정하는 데 쓰이는 ‘훅’ 등의 큰 구조에 각기 다른 레이스와 원단, 부속자재 등이다. 바지나 셔츠 등 일반 의류 제작에 쓰이는 자재는 5~6개다.
또 브래지어 컵 하나를 만드는 데 와이어, 레이스, 상컵과 하컵과 이를 지지하는 지지대, 장식용 자수 등이 필요하다. 자재가 많은 만큼 봉제 과정도 제품에 따라 최대 30개가 넘는 경우가 많다. 일반 청바지 봉제 작업의 3배 수준이다. 부자재도 많고, 만드는 절차도 많지만 무작정 기계화를 할 수도 없다. 피부에 직접 닿는 옷인 만큼 ‘완벽한’ 착용감을 위해 수작업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속옷에 신축성 있는 원단을 사용하는 것도 수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국내 업체 남영비비안의 봉제 작업 지도서에는 “봉제 시 원단이 늘어나지 않도록 하고 원단을 너무 당겨 늘어뜨리지 않도록 한다”는 조항이 항목마다 적혀 있다.

이처럼 섬세함이 필요하다 보니 매장까지 가지 못한 채 사라지는 제품도 많다. 시제품은 세탁 시험과 착용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상업 생산에 들어갈 수 없다. 착용 시험은 제품 크기에 따라 사내 전문 모델과 직원 모델 등 20~30명을 통해 이뤄진다.
비너스 브랜드를 생산·제조하는 신영와코루 관계자는 “부자재, 염색·가공, 봉제를 담당하는 자체 계열사를 통해 완제품을 만들고 있다”며 “매년 4000여종의 디자인을 개발하지만 상품으로 출시되는 것은 1500개뿐”이라고 말했다.
남성 속옷도 최근 소비자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인체공학적 설계를 강조하는 제품이 등장했다. ‘제임스딘’, ‘리복’ 등은 최근 음낭과 음경이 구분된 남성용 드로즈 팬티(스판소재를 사용한 타이트한 사각 팬티) 제품을 내놨다. 특수한 재료를 이용한 남성용 속옷도 등장했다. 쌍방울은 너도밤나무에서 추출한 천연섬유 ‘모달’ 소재로 만들어 촉감이 부드럽고 보온성과 흡습성이 뛰어난 기능성 발열내의, 사람 머리카락보다 얇은 원사로 만든 ‘210수 런닝’ 등을 내놨다.

■ 속옷은 산업이다
1920년대 이후 보편화된 브래지어 등 여성 속옷을 산업으로 양성화한 곳은 1977년 설립된 미국 란제리 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1995년부터 미국 텔레비전 황금시간대에 패션쇼를 열고, 이듬해부터는 보석으로 만든 ‘판타지 브라’ 시리즈를 매년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52캐럿 대형 루비 등 사용된 보석만 4200여점인 1000만달러(104억원)짜리 브래지어를 공개했다. 1996년 발표된 판타지 브라 가격이 100만달러(10억4000만원)였던 것에 비하면 20년도 안 돼 가격이 10배나 올랐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2012년 한 해 영업수익만 100억달러(10조4000억원)가 넘는 회사로 성장했다. 미국 유력지인 ‘뉴욕타임스’는 “(빅토리아 시크릿이) 금기시하던 란제리에 대한 접근을 쉽게 바꿨을 뿐 아니라 액세서리의 하나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최근 미국과 함께 ‘G2’로 떠오른 중국 속옷 산업도 주목받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광저우 무역관 자료를 보면 중국 여성 속옷시장은 매년 1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1000억위안(16조8200억원)을 기록했고 내년에 1300억위안(21조8700억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토종 브랜드가 강세다. 10위권 내 브랜드 중 8개가 중국, 홍콩, 대만 업체다. 마케팅 전략도 현지업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예컨대 6위 업체인 ‘어우디펀’은 ‘태극석 자기장’을 브래지어에 접목한 후 그 위에 자수를 수놓아 ‘건강’과 ‘아름다움’을 모두 잡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국내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자료를 보면 국내 속옷업계는 토종브랜드 5곳이 절반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남영비비안, 신영와코루, 좋은사람들 BYC, 쌍방울이 지난해 기준 각각 16.4~7.7%를 기록했다. 전체 시장은 장기 내수 침체 영향을 받아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속옷 시장 규모는 이전해보다 1.1% 증가한 1조8000억원대였다. 2010년에 9.5% 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정체돼 있다. 여기에 신규 업체들이 외국 브랜드를 수입·판매하면서 포화된 시장 내에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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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유통업체는 ‘고급화’ 전략으로 매출 상승을 꾀하고 있다. 갤러리아백화점은 최근 서울 압구정동 명품관을 리뉴얼하면서 해외 유명 브랜드 7개가 입점한 ‘란제리 존’을 만들었다. 팔케, 아장프로보카퇴르 등 4만원부터 최대 50만원에 이르는 고가 브랜드를 모아놨다.
갤러리아백화점 관계자는 “고객들이 기존 백화점에서 경험하지 못한 고급 살롱 개념을 차용해 란제리 존을 만들었다”며 “피팅룸에 고객이 매장 직원과 통화가 가능한 전화기를 설치해 ‘호텔식 룸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