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부실화, 황실보다 운영권 물려받은 미국 선교부 탓
▲ 조선정부 매해 운영비 3000원과 서양의사 급료 지급에 알렌도 “상하이 병원보다 우수”… 미국 선교부 재정 탄탄치 않아 점차 파행
제중원의 운영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환자 수는 들쭉날쭉했고 심지어 병원이 오랫동안 문을 닫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운영 부실의 주된 이유를 조선정부에 돌리는 주장이 있는데 과연 그런가?
정부는 개원 초 재원 조달에 난관을 겪기도 했지만 곧 어려움을 극복해 약값을 비롯한 병원 운영비로 제중원에 매해 약 3000원을 지불했다. 이와 별도로 1887년부터는 외국인 의사에 대한 급료로 매달 50원씩(연 600원) 지급했다. 이 밖에도 정부는 재동 시절 두 차례의 병원 확장 공사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2가와 명동)로 병원을 이전하는 등 많은 비용을 써서 제중원을 건물, 시설, 장비 등에서 손색이 없게 만들었다. 즉, 1894년 가을 제중원 운영권이 조선정부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중원의 재정은 탄탄했다.
1885년 제중원 설립 과정부터 1905년 제중원의 종언에 이르기까지, 의사와 주한 미국공사관 외교관으로 줄곧 제중원에 관여했던 알렌은 미국의 선교본부에 조선정부가 운영하는 제중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새 병원(구리개 제중원)은 제 기대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많은 점에서 이 병원은 이 도시에서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건물과 대지 비용 이외에 수리비만 3000달러(당시 원·달러 환율은 1:1) 이상 들었습니다.”(1886년 10월28일) “상하이에서 일하는 매클로드 의사의 의견에 따르면, 제중원은 상하이의 어떤 병원보다 뛰어난 장비들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1887년 8월2일) “제중원은 지원을 잘 받고 있습니다. 선교지부 사람들은 지원 규모와 유용성 등에 탄복하고 있습니다.”(1894년 4월18일)
반면에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시절 제중원에서 일한 여의사 에바 필드(Eva H. Field)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한 여성을 수술하기 위해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야 남자 환자들이 훤히 보이는 수술방 문에 이르게 됩니다. 수술이 끝나면 다시 바깥으로 나가서 높이가 다른 마당을 두 번 지나 깨끗하게 소독된 침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질환으로 또 얼마나 많은 환자가 누웠는지도 모르는 종이 바닥에 누워야 합니다.”(‘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 제63차(1900년) 연례보고서’)
■ 최초의 ‘가짜 여의사’ 파견 해프닝도
또한 에비슨이 1901년에 작성한 ‘대한제국병원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1900년 5월부터 1년 동안 선교본부가 제중원에 제공한 돈은 2040원이었다. 물가 상승과 환율 변동 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1894년 이전 정부의 제중원 연간 예산 3000원의 3분의 2에 불과하다. 또한 내부(內部) 소속 국립병원 광제원의 1901년 예산 7332원에 비하면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왕에게 제중원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라며 선심 쓰듯 운영권 이관을 요구해서 관철했던 에비슨과 선교부의 재정 능력은 이렇듯 충실치 못했다.
알렌은 ‘병원설립제안’에서 “책임자의 임무를 담당하겠다(當主首之任)”라고 했지만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알렌을 제중원의 제1대 병원장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제중원의 원장은 외아문 독판(장관)이나 협판(차관)이 맡았다. 알렌은 요즈음 식으로 말해 무급 객원의사로 2년 가까이 일하다 1887년초(음력) ‘제중원 의사’로 정식 임명되어 50원씩의 월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알렌의 뒤를 이어 헤론, 빈튼, 에비슨이 국립병원 제중원의 정규직 의사로 활동했다. 동시에 외국인 의사 여럿이 일한 적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정식 임명받은 사람은 1명씩이었고 나머지는 자원봉사격이었다. 또한 외국인 의사들의 역할과 권한은 직책보다는 국왕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차이가 매우 컸다. 알렌은 객원의사로 일하던 시절에도 권한이 막강했다.
■ 두 차례 확장으로 위용 갖춘 재동 제중원
‘재동 제중원’은 두 차례 확장되었다. 설립 때 제중원 면적은 약 2000㎡(600평)였다. 그 뒤 1년 사이에 825㎡(250평)가량 확장되었는데, 의학생 교육을 위한 ‘제중원 학당’ 설립이 주된 이유였다. 이어서 여성 환자들을 위한 제2차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886년 7월 ‘여성전용병동’이 완공되었으며, 때맞추어 선교본부는 ‘조선 최초의 외국인 여의사’ 엘러스(Annie J. Ellers)를 파견했다. 하지만 엘러스는 최초의 여의사가 아니라 최초의 ‘가짜’ 여의사였다.
두 차례의 확장으로 제중원은 더욱 훌륭한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뒤인 8월14일 알렌은 제중원을 이전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알렌은 이전 이유로 병원이 너무 좁고, 인구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이전 장소로 남별궁(南別宮)을 지목했다.
남별궁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대저택으로, 대지 면적은 재동 제중원의 다섯 배인 2만2000㎡(6700평)에 이른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중구 소공동에 속한다. 원래 이 집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 부부가 살던 집으로, 소공동이라는 지명도 ‘작은 공주 댁’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별궁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주둔한 이래 중국의 최고위급 사신이 머물던 곳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군대를 인솔해 온 청나라 오장경과 1883년 총판 조선상무(공사 격)로 부임한 진수당도 남별궁에 거주했다. 소공동 일대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오늘날 명동의 중국 대사관 자리에 청나라 공사관이 완공되었지만 진수당은 전임자들처럼 남별궁에 짐을 풀었다. 그만큼 조선으로서는 절치부심 되찾아야 할 곳이었다. 청나라는 1884년 7월 지금의 롯데호텔서울 자리에 청상회관(淸商會館)을 짓고 나서야 남별궁을 되돌려 주었다.
알렌은 이러한 내력을 지닌 남별궁으로 제중원을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당연히 조선정부는 알렌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위한 의료 사업에 항상 자비롭고 적극적이신” 고종도 알렌의 이 청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고종은 여러 모로 남별궁에 못지 않은 새 병원(‘구리개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주었다.
■ 알렌의 제중원 이전 요구는 타당성 의심
알렌이 제시한 병원 이전 이유들을 살펴보자.
(지도 1 표시)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너무 좁다고 했다. 좁고 넓은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재동 제중원이 남별궁이나 구리개 제중원보다 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설립되었을 때의 넓이가 2000㎡였고, 두 차례 확장으로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단순히 면적이 넓어진 것이 아니라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멋진 새 건물이 하사됐다” “설비가 잘 된 학교도 새 병원의 한 면모”라면서 크게 반겼던 알렌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 수의 증감이다. 환자가 계속 늘어났다면 병원도 확장되어야 할 것이지만 환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조선정부병원 제1차연도 보고서’에 의하면 첫 1년 동안 진료한 외래환자는 모두 1만46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첫 6개월 동안은 7234명이었다. 따라서 나중 6개월의 환자는 3226명으로 처음 6개월의 절반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헤론은 이미 1885년 10월에 의사 두 사람이 근무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실제로 1886년 1월부터 알렌과 헤론이 격주로 번갈아 병원에 출근했다. 기껏 하루에 환자 20명을 진료하는 마당에 근 300년 만에 겨우 되찾은 남별궁을 달라니, 제사보다 잿밥을 챙기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지도 2 표시) 알렌은 재동이 인구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이전 이유로 들었다. 재동은 당시 양반들이 살던 북촌의 어귀이며, 그 남쪽의 중인 및 서민 거주지에서 멀지도 않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재동 제중원 자리에는 1900년부터 1907년까지 7년이 넘게 광제원이 설치되어 수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이렇듯 재동은 당시 한성에 사는 조선인들을 위한 병원의 위치로 최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남별궁이나 구리개의 지리적 특징은 알렌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주로 살던 정동에서 가깝다는 점이다. 청나라 사람들의 거주지와는 더욱 가깝다. 일본인들도 1885년 무렵부터 근처의 남산 아래쪽에 밀집해 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제중원을 옮기려 한 것은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한 조처였다고 보인다.
(지도 3 표시) 알렌은 재동 제중원이 비위생적이라는 점도 이유로 꼽았다. 알렌이 이전 요구를 할 때까지 조선정부는 제중원의 수리, 개조에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했다. 1년4개월 사이에 위생적인 병원 환경을 갖추지 못했다면, 정치적·행정적 책임은 조선정부에 있겠지만 기술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또한 알렌의 요구대로 병원을 이전해서 그러한 점이 개선되었는가? 앞에서 언급한 에바 필드의 보고처럼 에비슨이 운영권을 이관받고 5년이 지난 뒤에도 제중원의 위생 환경 문제는 여전했다.
이렇듯 알렌이 제시한 제중원 이전의 이유들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었다. 또한 구리개는 예전의 서민 진료기관인 혜민서 자리에서 가깝긴 하지만, 일각에서 주장하듯 서민들을 위해 제중원을 구리개로 이전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렌의 제안을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알렌의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통해 오히려 제중원에 대한 알렌과 선교부의 시각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 알렌과 그 밖의 서양인 의사들, 그리고 그들을 파견한 선교본부의 목표와 지향점은 무엇이었고 그것은 조선인들의 이해관계에 얼마나 부합되었을까? 다음 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