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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 ③

입력 2014.05.02 20:50

수정 2014.05.0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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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미국 의사들, 제중원 운영·소유권 차지하려 계산된 진료 거부

▲ 의료보다 기독교 전파 염두에 둔 미국 북장로교 인사들, 조선 정부에 압력 행사 ‘선교병원’ 전환… 1905년 국고 환수 직후 일제에 의해 폐원

19세기말, 조선은 서양인들에게 머나먼 미개의 땅이었다. 미군함 팔로스호의 함장 보스트윅은 조선을 “유쾌한 일이 전혀 없는 곳. 집이란 거의 다 누추하고, 벼룩과 빈대와 이가 득실거리고, 하이에나 굴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넘쳐나는 나라”라고 묘사했다. 30년 넘게 조선에서 선교사로 일한 언더우드도 한성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단조롭고 세상에서 가장 염증이 나는 도시”라고 했다. 조선의 미와 장점을 예찬한 서양인도 있었지만 대개는 조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고, 그만큼 조선인들은 열등하고 자신들은 우월한 존재라고 여겼다.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한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알렌, 헤론, 빈튼, 에비슨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조선에 온 목적은 하느님을 모르는 미개하고 가련한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직접 선교가 허용되지 않던 상황에서 간접 선교의 방편으로 활용한 것이 의료였다.

알렌과 헤론이 근무한 동안은 조선정부와 큰 마찰이 없었다. “주님을 위해 영혼들을 구하겠다는 희망이 없다면 단 하루라도 조선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선교에 열정적이었던 헤론과 알렌이었지만 제중원에서 직접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목적(선교)과 수단(의료)을 실정에 따라 조화시킬 줄 알았다. 요컨대 제중원을 교두보로 삼아 제중원 바깥에서 목적을 실현하는 전략을 취했다. 헤론은 ‘제중원 의사’로 취임한 뒤 “제중원 일은 제 업무의 비교적 작은 부분입니다”라고 선교본부에 보고했다.

제중원의 탄생부터 종언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 관여한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의 외교관(1887~1889)과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의 외교관(1890~1905)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알렌은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을 지내는 동안에도 북장로교 선교본부와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제중원의 탄생부터 종언까지 거의 모든 과정에 관여한 알렌(Horace Newton Allen·1858~1932).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의 외교관(1887~1889)과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의 외교관(1890~1905)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알렌은 조선과 미국의 외교관을 지내는 동안에도 북장로교 선교본부와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 북장로교, 다른 교파 의사 임명도 막아

1890년 7월26일 헤론이 이질로 급사한 뒤 한성의 북장로교 선교지부는 이참에 제중원을 인수하여 선교병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영혼을 구제하는 일’ 대신 환자 진료에 치중해온 알렌과 헤론의 방식을 비판하는 선교사들의 주장이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선교지부의 결정은 조선정부가 감리교, 영국성공회 등 다른 교파 사람을 ‘제중원 의사’로 임명할까봐 전전긍긍한 선교본부의 입장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선교본부도 제중원을 넘겨받기 원했지만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891년 4월3일 제중원에 부임한 빈튼은 한달 남짓 지난 5월11일 제중원 운영비의 사용권을 요구하며 근무를 거부했다. 제중원 초유의 일이었다. 이에 6월27일 외아문 독판 민종묵은 미국공사 허드에게 “제중원은 본디 정부에서 설치한 것으로 함부로 규칙을 바꿀 수 없다. 그가 다시 올 뜻이 없다면 다른 의사를 고용하고 면직시키는 게 좋겠다”라는 공문을 보냈다. 조선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허드는 즉시 “빈튼은 병원 규칙을 기꺼이 따를 것”이라고 회신했고 빈튼이 7월4일 근무를 재개함으로써 ‘항명 파동’은 진정되었다. 조선정부 법률 고문인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는 “월급을 받고도 일하지 않은 빈튼의 행동은 횡령에 해당한다”라고 했는데, 미국에서라면 빈튼이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

이 과정에서 성공회 소속 와일스를 제중원 의사로 임명하려 한 조선정부의 계획은 고종과 친분이 두터운 알렌(이때는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이때 와일스가 임명됐다면 제중원과 북장로교의 인연은 끝났을지 모른다. 빈튼은 설상가상 제중원 안에 교회를 세우려 했지만 조선정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불만을 품은 빈튼은 병원 일에 더욱 소홀했고, 9월부터는 조선정부가 마련해준 사택에 따로 진료소를 차리고는 선교 활동을 했다. 빈튼이 근무한 2년 반 동안 제중원은 수시로 문을 닫는 등 파행이 거듭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으로 개항 이후 최대의 격변기를 맞던 와중에 제중원의 운영권은 미국 북장로교로 넘어갔다. 1893년 11월부터 제중원에서 근무한 에비슨은 제 구실을 못하던 제중원을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이런 차에 1894년 5월10일, 미국공사 실은 느닷없이 외아문 독판 서리 김학진에게 에비슨이 제중원 의사직을 사임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실 공사는 에비슨의 사직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에비슨이 약품비와 땔감비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 마련된 규칙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셋째는 그 동안 에비슨이 보수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정부에서 마련해준 사택에서 쫓겨나는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 조선·미국, 에비슨 처우 문제 외교 분쟁화

에비슨의 메모를 바탕으로 쓰인 <에비슨 전기>에는 봉급의 절반을 받지 못했다고 되어 있어 보수를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같은 공문에 알렌도 제중원 재직 당시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게다가 제중원은 민영익과 미국공사관이 협력해서 설립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정부의 기관을 미국공사관이 설립했다고 강변한 것을 착오 때문으로 볼 수는 없다. 이 공문은 에비슨의 사임을 통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중원에 관한 미국 측의 속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학진은 5월22일 답신을 보냈다. 약품과 땔감 값에 관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고 관련 직원을 징계했다는 것이다. 사택은 육영공원의 것을 잠시 빌려 쓴 것이므로 에비슨이 퇴거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 규칙과 월급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다음 날, 미국공사는 사택을 비워달라는 외아문의 요청을 에비슨에게 통지했다는 공문을 보냈다. 그런 뒤 양국 사이에 오간 공문은 없다.

하지만 8월 하순까지도 에비슨은 제중원 근무를 거부하고 있었다. 제중원 의사로 일하기 시작해서 첫 6개월은 근무했고, 나중 4개월은 근무를 하지 않은 셈이다. 빈튼의 사임으로 파행이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근무 거부의 이유는 불투명하다. 애당초 내건 이유는 대체로 충족되었고, 조치가 미흡하더라도 장기간의 근무 거부 이유로는 명분이 빈약하다. 따라서 겉으로 내건 이유와는 달리 에비슨은 제중원 운영권을 목표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러 가지 점에서 사실과 다르고 조선정부를 겁박하는 뉘앙스를 띤 미국공사의 5월10일자 공문도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정부로부터 중재 요청을 받은 알렌에게 에비슨은 이렇게 요구했다. “제중원의 모든 재산을 선교부에 이관하고 필요에 따라 선교부의 재정으로 제중원을 개조할 수 있도록 할 것. 이렇게 된다면 국왕에게 제중원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음. 1년 전에 알려주면 제중원의 모든 재산을 국왕에게 되돌려주겠으며, 그럴 경우 그 동안 건물 개축 등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우리에게 지불해야 함.” 이로써 에비슨이 근무를 거부해온 이유와 목표가 드러났다. 그것은 5월10일 미국공사를 통해 제시했던 사직 이유와 크게 달랐다. 알렌은 8월26일 선교본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반적인 개혁(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는 제중원을 박사님께 증서로 완전히 넘기든지 아니면 정부의 찬조 아래 운영할 수 있는 협약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제중원의 소유권, 최소한 운영권의 획득이었다.

그 뒤 미국공사와 외무대신 김윤식 사이에 몇 차례 공문이 오가면서 제중원 운영권의 이관이 확정되었다. 에비슨의 요구는 외무대신의 9월26일자 공문에 충실히 반영되었다. “모든 병원 업무는 에비슨이 관할하여 운영할 것이다. 제중원의 빈 터에 그가 거주할 주택을 짓는 것을 반대할 이유도 전혀 없다. … 언제라도 조선정부가 제중원을 환취하는 경우 그때까지 들어간 건축비와 수리비를 모두 지불할 것이다.” 사택 건축이 굳이 공문에 명기된 것으로 보아 에비슨은 육영공원 소관의 집에서 쫓겨난 데 대해 한이 맺혔던 것 같다. 그리고 에비슨은 향후 10년 동안 총 건축비·수리비의 75%이자 제중원 3년간 예산에 해당하는 8500원을 들여 자신의 집을 신축했다. 조선의 가난한 환자들, 그리고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라고 항변하는 에바 필드와 같은 동료 의료인들을 생각했다면 병원 운영의 책임자로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 일제 개입으로 환수 뒤 친일파 근거지 전락

이로써 제중원은 1905년에 다시 정부로 환수될 때까지 북장로교회 선교병원의 성격도 지니게 되었다. 정부는 1895년 아마도 신설할 의학교로 쓸 목적으로 환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한편 선교부도 1902년 특별전권공사 알렌을 앞세워 제중원의 소유권마저 차지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05년 4월에 정부가 제중원을 환수한 데에는 당시 미국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던 일본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석달 전이다.) 선교부로서도 미국의 대부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새 병원을 지었기 때문에 곧 한국을 지배하게 될 일본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는 되돌려받은 제중원을 더 이상 병원으로 사용하지 않아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에비슨의 사택은 노골적인 친일파 미국인으로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가 물려받았고, 환자들을 진료하던 건물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사교클럽인 대동구락부의 차지가 되었다. 미국에서 돌려받아 일본에 갖다바친 셈이었다.

제중원은 탄생(1885년)부터 종언(1905년)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제중원을 꼼꼼히 살펴보면 당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관계도 잘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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