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봄은 꽃이 아닌 슬픔으로 열린다. 묵은 계절이 가고 생명을 움틔우는 자연과 달리 한국의 봄엔 생명들을 떠나보낸 아픔이 흐른다. 4월 유채꽃 핀 남도(南島)에서부터 5월 광주까지 꽃길을 따라 슬픈 바람이 분다. 그렇게 한국의 봄날 마디마디엔 한(恨)들이 아롱아롱 맺혀 있다. 올봄은 많은 어린 꽃들을 잃은 슬픔이 더해져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라 전체가 무채색 공기에 갇힌 듯 침울하다.
![[마감 후]국가란 무엇인가](https://img.khan.co.kr/news/2014/05/22/l_2014052301003302800282962.jpg)
‘국가란 무엇인가.’ 이 잔인한 봄날을 지나는 우리 가슴을 납덩이처럼 누르는 화두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서울대 교수 시국선언)는 질타처럼 ‘국가의 배반’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힌 탓이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짐이 곧 국가”(루이 14세)라던 절대왕정이 아닌 지금 국가는 곧 ‘국민’이다. 하지만 국민은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헌법 전문)하던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배반당했다. 그것이 무능이든, 아니든 국민을 버린 국가는 스스로 존재를 부정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실상 3년 전 야권 대선주자로 거론되던 한 인사가 신작 저서 제목으로 던진 발칙한 질문이었다. 지금처럼 우울함보다는 국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과 함께였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잠재적 대선주자들이 저마다 ‘복지’를 이야기하는 변화의 끝점에서 ‘국가의 역할’이란 근본적 질문이 유행처럼 번져간 때문이었다.
그런 새 시대에 대한 예감을 당시 칼럼에서 ‘착한 국가’라는 제목으로 진단했었다. 국가의 책무가 ‘부국강병’의 주술(呪術)에서 풀려나고, ‘부(富)’가 카스트(신분제)가 된 시대를 넘어 새로운 사회·경제 민주화 세상의 새벽쯤이라고 말이다. 실제 그 1년 뒤 대선은 ‘경제민주화’ 구호를 선점한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경제민주화와 세월호의 두 극단으로 상징되는 ‘착한 국가2’는 배반당한 기대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대선이 끝나자마자 길을 잃었다. 경제민주화는 ‘규제 완화’에 떼밀려 용도폐기됐다. 복지는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국민들을 꾀기 위해 내놓는 ‘공짜 타령’ 정도로 정부·여당은 전락시켰다. 그들은 약속을 파기한 배신도 모자라 복지에 침을 뱉었다.
지난 3월20일 박 대통령이 작심하고 마련한 7시간 넘는 규제개혁 끝장토론은 그런 변심의 상징이다. 정부의 건강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감사원까지 한자리에 앉혀 놓고, ‘규제를 없애자’는 한길로만 달려가게 만들던 그 폭주가 안내할 세상이 두렵기만 했다. 토론이 아닌 교주를 향한 종교집회였다.
국가의 배반은 해묵은 ‘배반의 정치’를 생각하면 예고된 비극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정치를 가능하게 한 우리 사회 ‘팬덤(광팬) 정치’의 책임이기도 하다. 지역·세대·이념으로 편 가른 채 아무리 신뢰를 저버려도 묻지마 지지 행렬에 서는 광기(狂氣)들이 정치를 그렇게 길들인 것이다. 그런 집단적 정신착란 속에서 ‘상식과 평균의 정치’는 멸절되고, ‘비상식과 극단의 정치’만이 판을 친다.
‘국민이 곧 국가’인 진실을 확인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그것은 권력의 주인들이 정치에 합당한 ‘책임’이란 성적표를 줄 때만 가능할 것이다. 당장의 그 길은 ‘선거’일 것이다. 물론 ‘한 표’ 외엔 스스로 권력의 주인임을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은 너무도 목마르다.
하지만 정말 갈증나고 작게만 느껴지는 당신의 ‘한 표’지만, 작은 돌 하나씩을 쌓아올려 탑을 짓는 길에 나서지 않는다면 착한 국가를 향한 미래의 다리는 놓일 수 없다. 봄날의 민들레처럼 수천 수만의 꽃씨들이 되어 ‘배반 정치’의 불모지를 뒤덮을 때 ‘국민=국가’의 정의는 싹을 틔울 수 있다. 모든 것은 주인인 당신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