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첫 의학교, 조선민중 상향식 요구에 의해 자력 설립
▲ 김홍집 추진했다 아관파천으로 무산된 후 만민공동회서 주도… 대한제국정부, 독립협회 해체 정국서 정략적 당근으로 전격 수용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내세운 주된 명분은 스스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미개국을 근대적인 문명사회로 개발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근대화 성과를 말살했다. 완전한 병탄의 준비기인 1906년부터 1910년까지의 통감 통치 시절, 일제는 재정, 금융, 군대, 경찰, 사법, 교육 등 주요 분야들을 장악해 가면서 한국인들의 노력과 성취를 지우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보건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1870년대 이래 한국인들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거둔 성과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폄하하거나 아예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는 일제가 근대적 보건의료를 도입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다. 이러한 점은 주로 선교 목적으로 한국에 와있던 서양인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역사 왜곡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1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재론할 필요도 없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국가와 단체나 개인 또는 이념과 신앙을 선양하거나 폄하하기 위해, 있는 사실을 부정하고 없는 것을 만들어 내고 날조하는 행위 모두 선양(폄하) 대상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조선)은 1876년에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한 이래 공식적으로 근대서양의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민간과 정부에 의한 우두술 보급과 우두의사 양성, 제중원 설립과 운영, 근대식 보건의료 법령 제정 등이 그러한 과정에서 거둔 중요한 성과였다.
근대서양의료를 도입하는 데에는 민중들의 수용 자세와 더불어 의사 양성이 핵심적 과제였다. 그래서 정부는 1880년대부터 근대식 의사를 양성할 계획을 세웠으며, 실제로 제중원에 학당을 설치하고 교육을 시행했지만 의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의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의학교가 존속한 1899~1907년 내내 교장을 지낸 지석영의 동상(민경화 사진작가 제공). 서울대학교 연건 캠퍼스에 세워져 있다.
■ 1902년 최초 근대 서양식 의사 배출
그 뒤에도 정부는 근대식 의사를 교육, 양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정치적, 외교적 사정 등으로 실현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1899년 최초의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를 설립했다. 의학교는 정부가 세운 ‘관립(국립)’ 학교지만, 거기에는 선각적 지식인들과 수많은 민중들의 염원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의학교는 1902년 최초로 온전한 자격을 갖춘 근대서양식 의사 19명을 배출했다. 비록 일본보다 30년가량 뒤늦었지만 일본의 초기 의사 양성이 서양인들에게 크게 의존했던 데에 비해 훨씬 자립적인 모습을 보였다. 요컨대 의학교 설립은 당시 20여년에 이르는 근대의료 도입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일이었다.
1895년 2월26일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국가를 견고케 하기 어렵다”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국왕의 ‘교육입국조서’가 공포되었고, 이어서 ‘한성사범학교 관제’(5월10일), ‘외국어학교 관제’(6월11일), ‘소학교령’(9월7일)이 반포되었다. 이와 더불어 근대적 의학교육기관과 의료기관도 준비되고 있었다. 1896년 정부 예산에 의학교 및 부속병원과 종두의양성소 비용이 책정되었거니와 그보다 7개월 앞선 1895년 6월14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에비슨에게 운영권이 이관된 제중원 관사를 반납해줄 것을 요청했다. 용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의학교와 부속병원으로 쓰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때 제중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돌려받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1896년 초 2만여원의 예산이 책정되는 등 의학교와 부속병원은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2월11일의 ‘아관파천’으로 의학교 설립 계획은 좌초되고 말았다. 즉 총리대신 김홍집이 국왕과 친러·친미파의 계략으로 광화문 앞에서 참살됨으로써 을미개혁 정부는 붕괴되고 의학교도 실종되었다.
김홍집 내각의 계획이 무산된 뒤에도 근대적 의학교육기관과 병원을 설립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방식이 종래의 하향식에서 민중이 참여하는 상향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1898년 7월15일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는 의술학교 설립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 뒤 목원근, 송석준, 홍정후 등 세 사람을 대표로 선임하여 학부대신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건의하는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이제 입헌군주제나 의회 설립 등 권력구조 문제와 더불어 의료와 교육 등 ‘생활정치’ 문제까지 민중들이 거론하는 단계로 한국사회가 발전하고 있었다. 열흘쯤 뒤 학부대신 서리 고영희는 당장은 예산 부족으로 의술학교를 세우지 못하지만 형편이 나아지면 설립할 수 있다는 답신을 보냈다.
1899년 3월24일 공포된 칙령 제7호 ‘의학교 관제’(규장각 소장). 왼쪽 위에 고종의 사인이 있다.
■ 지석영이 건의서 보낸 이틀만에 설립 회신
근대적 의술과 그것을 가르칠 의학교육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민중들이 분명히 인식했으며 나아가 그것을 주체적으로 요구했다는 사실은 의료분야뿐만 아니라 근대화 역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의학교 설립 논의가 펼쳐지고 있을 때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정부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핵심 회원 17명을 체포한 사건으로 민중의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있던 11월7일, 의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서신을 학부대신에게 보냈다. 지석영은 숙망인 의학교 설립에 관해, 자신의 <우두신설>에 서문을 쓸 정도로 교분이 두터운 학부대신 이도재에게 건의서를 보낸 것이다. 지석영의 건의서에 담긴 의학교의 구체적인 운영 방안과 전망은 대부분 ‘의학교 관제’와 ‘의학교 규칙’, 그리고 실제 운영에 반영되었다.
학부대신은 지석영의 건의서가 제출된 지 불과 이틀 만인 11월9일자로 바로 다음 해인 1899년 봄에 의학교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신서를 지석영에게 보냈다.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빠르고 속 시원한 회답이었다. 정부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급박한 정국, 특히 독립협회의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경부터 무능하고 부패한 대신의 사임 요구, 의회 설립 및 그것에서 한발 후퇴한 중추원 개혁 요구 등 본격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0월29일에는 종로에서 사상 최초로 정부대신들과 민간단체들이 함께 참석하고 1만여명(당시 한성 인구는 약 20만명)이 운집한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어 현안에 대한 민간의 요구가 담긴 ‘헌의 6조’를 채택했다. 독립협회가 정국 주도권을 잡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상황이 급변했다. 한성(서울)의 여러 곳에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가 대통령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정체불명의 벽보가 나붙었고, 조병식 등 일부 황실 측근세력들은 국왕에게 독립협회가 국체를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고 허위 보고했다. 음모의 전말을 알았던지 몰랐던지, 국왕은 이상재 등 독립협회의 핵심 간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독립협회 해산 조칙을 발표했으며, ‘헌의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하고 조병식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 회원들을 비롯하여 민중들은 ‘철야 장작불 집회’ 등으로 거세게 저항했다.
지석영이 건의서를 보내고, 이도재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하는 답신을 보낸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다. ‘채찍과 당근 정책’을 연상시키는 정황이다. 즉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정치운동을 탄압하는 대신, 그밖의 개혁 요구는 어느 정도 수용한다는 국왕 고종과 새 내각의 전략이 엿보이는 것이다. 지석영과 이도재 사이의 친분도 작용했겠지만, 당시 상황이 민중들의 의학교 설립 요구를 수용하게 된 더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 외국인 도움 아닌 자립적 설립에 의의
약속에 따라 정부는 의학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 6000원을 1899년도 예산에 편성했다. 이 가운데 절반을 설립비라고 추산하면 설립 첫해의 운영비는 3000원으로 같은 해 성균관, 한성사범학교, 영어학교 등의 운영비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것이었다.
예산 배정에 이어 학부는 1899년 2월28일자로 대신 신기선의 명의로 ‘의학교 관제 청의서’를 제출했으며, 법안 심의를 맡은 중추원은 3월8일 이를 통과시켜, ‘의학교 관제’가 3월24일 칙령 제7호로 반포되었다. 의학교의 교장과 교관(교수) 등을 선임하고, 학교 건물과 설비를 마련하고, ‘의학교 규칙’(학부령)을 제정하고, 공개적으로 학생을 선발한 조치들은 모두 이 ‘의학교 관제’에 의한 것이므로 1899년 3월24일을 의학교의 공식 설립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날은 의학교라는 한 교육기관의 설립일일 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의학 교육의 탄생일로 한국근대의학 역사에서 뚜렷한 획을 긋는 날이기도 하다. 1880년대 우두의사를 교육하고 배출했던 경험이 20년 뒤에 더 큰 성과를 낳은 것이다.
1주일 뒤인 1899년 3월31일 대만에도 의학교가 설립된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의 대만총독부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세운 것으로 한국의 의학교와는 설립 과정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의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