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 설립 지방 확대 계획, 일제 침략으로 무산
▲ 대한제국 정부, 국공립 병원 전국 각지 건립 구상과 맞물려 추진… 의학교 졸업생 의사 시험 없이 개업면허 특혜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본적으로 초등과정(초등학교), 중등과정(중학교와 고등학교), 고등과정(대학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화의 중요한 산물로 세계 공통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이러한 근대식 학교교육 체계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초등교육기관과 중등교육기관이 최초로 탄생한 곳에 세워진 표석들. 각각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교동초등학교와 화동의 정독도서관(옛 경기중고등학교) 입구에 서 있다. 반면 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인 ‘의학교’ 표석은 세워진 바가 없다. | 이규원 사진작가 제공
■ 1895년 근대 교육법령 제정, 공포
근대적인 교육 관련 법령이 제정, 공포된 것은 1895년부터이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한성사범학교 관제’(5월10일), ‘외국어학교 관제’(6월11일), ‘소학교령’(9월7일)이 모두 칙령으로 잇달아 반포되었으며 그 법률들에 따라 각각 해당하는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소학교령’에 따라 1895년 9월16일에 설립된 학교는 장동(壯洞)소학교, 정동(貞洞)소학교, 계동(桂洞)소학교, 주동(紬洞)소학교 등 모두 국가에서 설립한 관립(국립)기관이다. 각각 9월26일과 10월1일 사이에 개교한 네 군데 관립 소학교의 학생 수는 모두 합해 187명이었다. 하지만 이들 학교가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은 아니다. 이에 앞서 1894년 10월16일(음력 9월18일) 교동(校洞)의 전 광무국(鑛務局) 자리에 학무아문(지금의 교육부로 1895년에 학부로 개칭) 소속의 ‘소학교’가 세워졌다.
오늘날 교동초등학교의 기원으로,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는 9월18일은 음력 날짜이다. 이 교동의 소학교는 이듬해 ‘한성사범학교 관제’에 규정된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가 되었으며, 뒤에 ‘관립 교동소학교’로 개칭되었다. 1895년 10월2일자 관보에 따르면 재학생은 136명으로 다른 네 곳의 소학교보다 규모가 컸다. 이후 소학교는 점차적으로 늘어나 1899년 말에는 한성(서울)에 관립 소학교 10개, 사립 소학교 11개, 지방에 공립 및 사립 소학교 62개 등 모두 83개가 되었다. ‘소학교령’에 규정된 수업 연한은 심상과(보통과) 3년, 고등과 2~3년으로 도합 5~6년이었다. 전체 연한은 오늘날과 비슷하지만 심상과와 고등과가 구별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소학교에서 졸업생이 배출된 것은 심상과가 1896년, 고등과가 1898년부터이다. 학력이 충분하다고 인정되면 수업 연한을 채우기 전에도 졸업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소학교, 특히 고등과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정부는 중학교를 설치할 준비를 시작했다. 1899년 정부 예산에 중학교비 7400원을 책정했으며, 1899년 4월4일자로 ‘중학교 관제’를 반포했고, 교직원들도 임명했다. 학부 학무국장 김각현(金珏鉉)이 중학교 교장으로 겸임 발령을 받은 것은 5월16일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설립은 계속 지연되어 ‘중학교 관제’가 반포되고 1년 반이나 지난 1900년 10월3일에야 개교를 하게 되었다. 중학교의 수업 연한은 심상과 4년, 고등과 3년이었다. 공립 및 사립 중학교에는 심상과 설치만 허용되었고, 고등과는 한성의 관립 중학교에만 두도록 했지만 실제 설치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자격은 고등소학교 졸업자로 제한하되,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충분하지 않은 동안은 외국어학교 졸업생과 “문산이 초유(稍裕)하고 재지가 총명한 사람”도 시험을 치러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항에 의하면 당시 외국어학교는 고등소학교 급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고등소학교 제1회 및 제2회 졸업생과 입학시험에 합격한 총 80명이 ‘관립 중학교’(오늘날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최초로 중학생이 되었다.
■ 의학교 입학, 특별시험 통해 자격 부여도
이 당시 중학교보다 상급학교로 어떤 것이 있었을까? 갑오을미 개혁 시기부터 고등교육기관 설립에 관한 논의가 있었지만, 1910년 경술국치까지 대학교에 관한 법령이 제정된 것은 없다. 그러면 입학 자격으로 중학교 졸업 학력을 요구하는 학교는 있었을까? 1899년 7월5일 공포된 학부령 제9호 ‘의학교 규칙’은 의학교의 입학 자격을 “중학교 졸업장이 있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의학교 규칙’이 공포된 것은 중학교가 설립되지도 않은 때였으니 해당 조항은 뜬금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실정을 감안해서 ‘의학교 규칙’은 단서조항을 두었다. “단 당분간 중학교 졸업생이 없으므로 문산이 초유하고 재지가 총명한 사람을 특별시험을 통해 입학시킨다.” 요컨대 의학교를 중학교 위의 고등교육기관으로 하되, 학생 선발은 당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895년에 설립된 ‘법관양성소’는 여타의 교육기관들과는 달리 학부가 아니라 법부 소속이었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입학에 필요한 학력을 규정하지 않다가 1908년 3월6일 제정된 ‘법관양성소 학칙’에서 비로소 입학 자격을 “관립 일어학교 또는 관립 고등학교 졸업자나 그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고등학교는 중학교의 상급학교가 아니라 1906년 8월27일부터 명칭만을 바꾼 것이다.) 이때는 이미 중등학교 졸업생이 적지 않게 배출된 때이므로 ‘의학교 규칙’에서와 같은 단서조항이 필요 없게 되었다. 비록 망국을 눈앞에 둔 때이지만 근대식 교육체계는 좀더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 기초과학·의학, 임상의학 골고루 배워
이렇듯 대한제국 정부가 초등-중등-고등 과정이라는 근대식 학교교육 체계를 마련했고, 우선 ‘의학교’를 그리고 뒤에 ‘법관양성소’를 최상급 학교, 말하자면 대학급으로 설정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만큼 당시 근대적 의료와 법률의 도입이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근대 의료와 법률을 중시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일본 최초의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인 도쿄대학이 1877년 4월12일 의학부와 법학부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의학교 관제’(1899년 3월24일)는 제1조에서 의학교의 성격을 “국민에게 내외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 곳”으로 규정했는데, 여기에서 ‘내외 각종 의술’이란 내과와 외과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의술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인 학과목은 화학, 물리, 해부, 생리, 내과, 외과, 부인과 및 소아과 등 16과목으로, 요즈음 식으로 말해 기초과학, 기초의학, 임상의학 과목이 골고루 포함되었다. 그리고 제12조에는 “지방정황에 의해 의학교를 지방에도 설치한다”라고 하여 근대식 의학교육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을 천명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은 꼭 한달 뒤인 4월24일 칙령 제14호로 반포된 ‘병원 관제’ 제13조의 “지방정황에 의해 병원을 각 지방에 설치한다”에서 나타나듯이 국공립 병원의 전국적 확대 계획과 짝을 이루었다. 요컨대, 비록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좌절되기는 했지만, 당시 정부는 전국 각지에 의학교와 병원을 건립할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의학 교육은 학부 소관이었지만 의사 면허 관리는 내부에서 관장했다. (오늘날도 비슷하여 각각 교육부와 보건복지부가 담당하고 있다.) 내부는 ‘의사 규칙’(1900년 1월2일)에서 “내부의 시험을 거쳐 인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업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의학교 졸업생들은 이와 별도로 ‘의학교 규칙’에 의해 특혜를 받았다. ‘의학교 규칙’에 “졸업장을 부여한 후에 내부대신이 의술개업면허장을 부여한다”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이른바 ‘총독부 지정학교’(1923년 이후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 출신들이 의사시험을 치르지 않고 면허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교 졸업생들은 의학교 교관, 군의관 등 국가의 관리로 임용되고 개업을 하는 등 의사로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정부의 꼼꼼한 검정 거쳐야 인가
‘의학교 규칙’은 기본적으로 1899년에 정부가 세운 ‘관립’ 의학교에 관련된 사항을 규정한 법령이지만, 장차 ‘공·사립’ 의학교가 세워질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조항도 미리 마련해 두었다. “공·사립 의학교는 지방관과 관찰사를 거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공·사립 의학교의 학과 및 정도와 기타 규칙은 학부에서 정하고 교과서도 학부의 검정을 거쳐야 한다.” 즉 대한제국 내에 공립이든 사립이든 의학교를 설립하려면 반드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설립 인가뿐만 아니라 학과 등에 관한 규칙도 학부에서 정하고 교과서도 학부의 검정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의 간섭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꼼꼼한 규정이었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이 제정되기 전에는 관련 ‘법률’이 없어서 공식적으로 사립 의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든 이 법령에 따라 설립된 공·사립 의학교는 한 군데도 없었다. 설립을 신청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1900년말, 우두 교수를 지낸 김인제 등이 공주군에 의학교 설립을 추진했지만 구상으로 그쳤다. 그밖에도 의술을 가르친다는 병원이 몇 있었지만 법에 의거해 국가와 사회의 인정을 받는 의학교를 설립한 곳은 없었다. ‘의학교’보다 10년 뒤인 1909년에 세워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는 조금 전에 언급한 ‘사립학교령’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