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생들 졸업 후 진로 마땅찮아 중도 이탈 해마다 늘어
▲ 대부분 임시·명예직에 학교 운영도 순탄치 않아 1902년 입학생 중 졸업생은 4명뿐… 거주지서 의술 펼친 ‘근대 의사’ 배출엔 의미
1899년 3월부터 1907년 3월까지 8년 동안 의학교 교관(교수)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18명이지만 절반 이상은 재임 기간이 매우 짧아 실제로 교관 역할을 한 사람은 8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김익남(도쿄 자혜의원 의학교 졸업), 남순희(도쿄 공수학교<工手學校> 졸업), 장도(도쿄 법학원 졸업), 유세환(도쿄 약학교 및 도쿄 제국대학 의과대학 선과<選科> 졸업), 최규익(도쿄 고등공업학교 화학공예부 졸업) 등 5명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며, 김교준과 유병필은 의학교 제1회 졸업생, 전용규는 일반 관료 출신으로 이들은 당시 최고의 신지식인 엘리트들이었다. 그밖에 일본인 의사 고죠(古城梅溪), 그리고 고죠가 해부학 수업 부실 때문에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그만둔 뒤에는 고다케(小竹武次郞)가 교사로 일했다.
의학교는 큰 기대를 받으며 출발했지만 운영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제1회 졸업생의 경우, 졸업증서를 받은 1902년 7월까지 의학교육에 꼭 필요한 임상실습을 거의 하지 못했다. 부속병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학교가 설립될 때부터 교장 지석영 등이 정부에 부속병원의 설립을 요청했지만, 재정 형편 등으로 차일피일 미루어지다 1902년 8월에야 겨우 병원이 완공되어 제1회 졸업생들은 뒤늦은 임상교육을 받은 뒤 이듬해 1월에 졸업식을 가졌다. 하마터면 이들은 제대로 된 임상 훈련을 받지 못한 채 환자 진료를 할 뻔했다.
또한 일본인 교사가 한국어를 하지 못해 통역을 통해서 수업을 하고 교과서도 대부분 일본어로 된 것을 사용한 것도 작지 않은 문제였다. 학생들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학교에 일본어 강좌를 개설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야간강습소 등에서 일본어를 따로 배워야 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일본어를 습득함에 따라 일본어로 된 의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그밖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의학생들에게 큰 걱정거리로 다가왔던 것은 졸업 후의 진로 문제였다. 근대서양의술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와 수요는 이전에 비해 늘어났지만, 실제 의학교 졸업생들이 일할 공간은 여전히 좁았다. 이들이 스스로 병원이나 진찰소를 열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부족했고(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제2회 졸업생 최국현이 졸업 후 1년 동안 ‘의술개업’을 한 것이 고작이다), 취업할 의료기관도 거의 없었다. 양방과 한방을 병용한 국립병원 광제원은 종두의사와 한의사들이 선점하고 있었고, 일본인과 서양인 의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리도 없었다.
홍영식(왼쪽)과 김홍집. 19세기말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로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을 당당하게 맞았다. 1884년 갑신정변과 1896년 아관파천 때 역적으로 몰려 참혹한 죽임을 당한 뒤 빼앗긴 이들의 집은 각각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제중원)과 근대식 국립의과대학(의학교)이 되었다.
■ 정부, 완전 무상교육 노력 불구 활용 못해
정부는 의학교 학생들에게 수업료와 기숙사비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와 필기도구 등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학생 유치와 의사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와 더불어 정부는 의학교 졸업생들을 활용할 방안도 함께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 점이 미흡했다. 국공립 의학교와 병원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장밋빛 청사진은 있었지만, 그러한 꿈을 실현할 구체적인 역량은 부족했던 것이다. 학부는 궁여지책으로 의학교 졸업생 전원을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했지만 명목에 지나지 않았고, 김교준과 유병필 2명만이 실제로 교관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의학교 졸업생들이 임명받은 임시위생원 위원이나 유행병 예방위원, 검역위원 자리도 임시직이거나 명예직이었을 뿐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대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의학생들의 중도 이탈이 적지 않았다. 1899년 9월, 의학교가 수업을 개시했을 때 50여명에 이르렀던 의학생 수는 점차 줄어들어 입학생의 40퍼센트도 안 되는 19명만이 졸업했다. 1900년에 입학한 제2회의 경우, 입학생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졸업생이 13명으로 제1회 때보다 사정이 악화되었으면 되었지 개선되지 않았다. 그리고 1901년에는 아예 입학생을 뽑지 않았으며 1902년 입학생 가운데에는 불과 4명만이 졸업했다. 발전은커녕 날이 갈수록 형편이 나빠졌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의학교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신식 학교는 거의 모두가 겪는 홍역이었다. 국운이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근대식 제도와 문물이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 일제·외국 의사들, 의학교 존재 폄하
일제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외국인 의사들이 의학교와 그 졸업생들의 존재를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하려 했다.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인들에 의한 의학교의 설립, 운영과 그를 통한 최초의 근대식 의사 배출의 의의를 깎아내리려 했다. 물론 그들의 그런 태도에는 한국인들의 자주적 노력을 비하하고 능멸함으로써 자신들의 성가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의학교와 졸업생들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을까?
의학교 졸업생 가운데 제2회의 홍종욱과 같이 졸업 뒤에 관료 생활을 하는 등 진로를 바꾼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의사로 활동했다. 근대식 의학교육을 받은 한국인 의사가 극히 적었던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 초기, 근대 의료에 대한 한국인(조선인) 환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은 바로 이들 의학교 출신들이었다. 유병필, 강원영, 김수현, 박계양과 같이 의사로서 명성을 날린 사람들 외에도 의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 의술로 환자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었다. 의학교와 졸업생들의 의의를 이것 이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졸업 직후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의학교 졸업생들은 대개 1904년경부터야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장병들의 건강을 돌보았으며, 1907년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된 뒤에는 의원이나 진찰소를 열든지, 아니면 다른 자본주들이 개설한 의원과 약국에서 고용의사로 일했다. 그리고 고용의사들도 차차 경제적 기반을 갖추면서 스스로 개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이규영, 김봉관, 유병필 등은 여러 계몽운동단체 기관지에 위생과 의학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는 등 사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의학교는 36명(의학교로 입학하여 대한의원에서 졸업한 사람까지 합하면 54명)의 근대의사를 배출하고는 일제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와 그 동조자들에 의해 그 역사적인 성과마저도 폄훼되고 백안시되곤 하였다. 국가가 패망하고 민족이 자주적 권리를 잃은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지 모른다.
■ 개화파 김홍집의 자택을 학교로 활용
그러면 이 자주적 근대의학교육의 원류이자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의 출발점이라고 할 의학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황현의 <매천야록> 제3권에는 “의학교를 설립하여 고(故) 김홍집의 집을 교숙(校塾)으로”라고 되어 있다. 갑신정변 때 참살당한 급진개화파 지도자 홍영식(洪英植·1855~1884)의 집이 한국 최초의 근대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되었듯이, 아관파천 때 국왕 고종의 비열한 배신으로 역시 참혹한 죽음을 당한 온건개화파의 거두 김홍집(金弘集·1842~1896)의 집이 한국 최초의 근대서양식 국립의과대학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김홍집이 1895~96년에 시도했던 의학교 설립이 그 자신의 집을 빌려 비로소 실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틱하고 기구한 한국 근대화 과정의 한 장면이다.
<경성부사(京城府史)>(1934년)에는 “의학교는 광무 3년 3월 현 경운동 경성사범학교 부속여자보통학교 서측 운동장 한구석에 있던, 전 총리대신 김홍집의 구저를 교사로 하여 창립”이라고 의학교와 김홍집의 집이 언급되어 있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 네거리 남서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의학교가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된 뒤에는 독일어학교가 잠시 사용했고, 이어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와 경성사범학교가 그 자리에 있었으며, 해방 뒤 1968년부터 1982년까지는 가톨릭대학 의학부가 그곳을 이어받았다.
의학교는 또한 1907년 2월1일에 창설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한글(운동)단체인 국문연구회의 산실이자 거처이기도 했다. 황성신문 1907년 2월6일자는 다음과 같이 국문연구회의 탄생을 보도했다. “국문연구회를 거 금요일 하오 7점에 훈동 의학교 내로 임시 개회하고 규칙과 임원을 천정하얏는대 회장은 윤효정씨요 총무는 지석영씨요 연구원은 주시경 박은식 이능화 유일선 이종일 전용규 정운복 심의성 양기탁 유병필씨 등 10인이 위선 피천되고 편찬원은 지석영 유병필 주시경 3씨요 서기 2인에 전용규 1인만 위선 선정하얏는대 연구원회는 매 금요일 하오 7점이요 통상회는 매월 제4 일요일 하오 4시에 개회하기로 정하얏더라.” 이 기사와 같이 윤효정, 주시경, 박은식, 이종일, 양기탁 등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국문연구회에 참여했으며, 의학교 교장 지석영과 교관 전용규, 유병필은 그 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의학교 자리에 표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이 역사를 대하는 오늘날 한국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