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의 야심작’ 대한의원… 일본인들의 한국 이주 위한 책략
▲ 병원·의학교 통폐합으로 의료까지 장악, 현 서울대병원 자리에 ‘한국 의료 발달’ 명분 최신식 병원 설립… 개원 첫해 입원환자 73%가 일본인
대한제국이 온전한 국가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국가 기능의 핵심인 외교권을 상실했을 때부터라 할 수 있다.
을사늑약 체결을 지휘한 뒤 잠시 일본에 돌아갔다 1906년 3월2일 한국 통감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내정도 속속들이 장악해가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자체가 불법이거니와 외교권 위임만을 규정한 늑약 내용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토는 1909년 6월14일까지 3년 남짓 통감으로 재임하면서 행정, 사법, 재정, 군사, 경찰, 보건의료, 교육 등 한국이라는 국가의 거의 모든 권한과 기능을 빼앗았다. 이토가 후임자 소네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줄 때에는 이미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의원. 한국 의료를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한국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세워진 대한의원은 한 마디로 ‘이토 히로부미의 병원’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소장 <대한의원 개원식 기념사진첩>)
■ ‘의학계의 이토’ 사토 스스무가 실무 총책
통감 이토는, 국가는 아랑곳없이 잇속 차리기에만 급급한 한국인 대신들과 구성한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한국을 통치했다. 의료 문제가 1906년 4월9일에 열린 제3차 협의회에서부터 논의된 것을 보면 이토가 의료 장악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제3차 협의회에서 논의된 핵심은 한성에 있는 병원들을 통합하자는 것으로, 이토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경성에는 한성병원(일본 거류민단 병원), 적십자병원,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문적인 병원 체계와 설비를 갖춘 것은 한성병원뿐이다. 다른 세 병원은 규모가 작고 분립되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으니 통합해서 적십자병원 하나로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의학교도 폐합하자는 학부대신 이완용의 수정안을 이토가 받아들임으로써 통합의 대략적 방침이 정해졌다. 이 방침에 따라 이듬해에 설립된 병원이 바로 대한의원이며, ‘대한의원’이라는 이름도 이토의 작품이다.
이러한 의료기관 통폐합 계획에 대해 한국인들의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통폐합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의료기관을 더욱 확장하여 의료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또한 일제의 조치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책략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비판에 아랑곳없이 병원 통폐합은 거리낌 없이 추진되었다. 우선 1906년 6월 일본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佐藤進·1845~1921)가 ‘일본 국왕의 명의’로 실무 총책에 임명되었다.
‘의학계의 이토 히로부미’로 한국과 중국의 의료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된 동인회의 부회장이기도 한 사토 스스무는 일본인 8명만으로 대한의원 창설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지 선정, 병원 건축, 법령 마련 등 업무를 빠르게 진행해나갔다. 창설위원들은 이토의 측근, 동인회 관계자, 그리고 통폐합 대상인 광제원, 의학교, 적십자병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의학교와 병원에서 활동하던 한국인들은 대한의원 설립 과정에서 대부분 퇴출되거나 역할이 축소되었다. 요컨대 의학교 및 부속병원, 광제원, 적십자병원을 통폐합하여 1907년 3월에 세워진 대한의원은 설립 준비 때부터 일제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
■ 비용 40여만원, 일본 차관으로 조달
1906년 9월, 대한제국 의료의 중추 역할을 해 온 광제원과 의학교를 폐지하고 대한의원을 창설한다는 계획이 공식 선포되었고, 마등산 일대에 병원을 건립하기 위해 인근 가옥과 토지를 매입한다고 고시되었다. 마등산 지역은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로 당시에는 창경궁의 외원(外苑)인 함춘원이 있었다. 이어서 야바시의 설계와 오쿠라의 건축 감독 하에 1907년 1월28일부터 건물 공사가 착공되어 열달 만에 대한의원 본관(시계탑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08년 10월 부속학교 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완공되자 1년 반 이상을 미루었던 개원식이 10월24일에 거행되었다. 날짜는 이토의 일정에 맞춰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 순종은 개원식에 즈음하여 일제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칭송한 ‘대한의원 개원 칙어’를 발표했다. 일본인 기자 아사히는 대한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모범병원 대한의원의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 대규모 둥근 건물의 아름다움은 한성의 전 시가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며, 규모와 설비가 일본 유수의 병원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대한의원 건설비용으로 지출한 40여만원은 정부 연간 총예산의 2%에 이르는 거액으로, 태반이 일본 차관이었다. 민간에서 거족적으로 국채보상운동(20만원가량 모금되었다)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 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돕는 병원을 짓기 위해 새로운 일본 빚을 얻고 있었다.
■ 의정부 직속기관으로 내부대신이 원장
대한의원 창설위원회가 만든 법률 ‘대한의원 관제’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한의원이 내부와 같은 한 부처가 아니라 의정부 직속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대한의원은 내부가 관장하던 병원 업무와 학부 소관이던 의학 교육, 그리고 위생국이 담당하던 보건위생 행정을 모두 포괄하는 기구이므로 최고위 정부기구인 의정부 직속으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병원의 총책임자인 원장을 내부대신이 겸임하는 자리로 격상시켰다.
일제가 대한의원의 성격과 위상을 이렇게 만든 것은 보건의료와 관련되는 모든 사항을 대한의원에 집중시킨 뒤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대한제국의 보건의료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일제는 대한의원을 통제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관제에 마련했다. “원장은 고문과 협의한 후에 원무를 정리(整理)한다”라는 조항이 그것이다. 관제를 만들 무렵까지는 일본인이 고위 관리직을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토 스스무가 고문이 되어 병원과 보건위생 업무에 아무런 식견도 없는 허수아비 원장인 내부대신 이지용(을사 5적)과 임선준(정미 7적)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정미 7조약’ 체결(1907년 7월24일)로 일본인이 고위직에 취임할 수 있게 되자 대한의원 관제를 개정하여 사토 스스무가 원장이 되었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 의도가 명시적·암시적으로 담긴 대한의원 관제가 1907년 3월15일자로 발효함으로써 대한의원이 설립되었다. 대신 그때까지 8년 동안 국가병원 역할을 하던 광제원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대한의원 설립 직후 병원의 실무 책임자는 예정대로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통합 전의 광제원장에 해당하는 치료부장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주치의인 고야마, 의학교장 격인 교육부장에는 의학교 교사를 지낸 고다케, 종래의 내부 위생국장 역할을 담당하는 위생부장에는 광제원 의장(醫長)이었던 사사키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의원 창설위원으로, 그들의 작업 결과로 대한의원이 설립되자마자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 이재명의 습격 받은 이완용을 살리다
병원의 실제 이용 양상 역시 대한의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08년 대한의원 입원환자는 한국인 159명(27%), 일본인 428명(73%)이었으며, 외래환자는 한국인 4913명(48%), 일본인 5253명(52%)이었다. 1909년에는 입원환자가 한국인 208명(23%), 일본인 699명(77%)이었으며, 외래환자는 한국인 6474명(43%), 일본인 8412명(57%)이었다.
병원을 이용한 환자의 절대수도 일본인이 많지만, 당시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구를 함께 생각하면 대한의원이 일본인을 위한 병원임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통감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말 한성(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약 241만명, 일본인은 4만7000여명으로 일본인은 한국인의 2%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한의원은 이들 소수의 일본인을 위한 병원이었다.
대한의원을 이용한 한국인은 무료로 진료받는 천덕꾸러기 시료환자 외에는 대체로 비싼 진료비를 지불할 재력이 있고 일본인 의사들의 진료를 꺼려하지 않는 극소수 특권계층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1909년 12월22일 이재명의 응징 습격을 받아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이완용으로, 대한의원이 없었다면 이완용은 목숨을 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병원 이용 실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을 세운 데에는 한국 의료 장악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유럽 식민지들과는 달리 일제는 한국을 일본인들이 실제로 많이 거주하는 곳, 글자 그대로 ‘식민지(植民地)’로 만들려 했다. 그러려면 일본인들이 별걱정 없이 한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을 위한 최신식 의료기관을 세워야만 했다.
이토는 대한제국 정부가 거액의 일본 차관을 빌려 일본인 이주자와 식민지 통치자들을 위한 최상급 병원을 짓게 함으로써 거뜬히 문제를 해결했다.
노회한 정략가다운 1석3조, 1석4조의 간교한 책략이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내건 명분은 ‘한국의 의료 발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