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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질병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일리아드’와 ‘신성병에 대하여’

입력 2014.07.18 20:41

  •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신이 내린 병 노래한 호메로스…300년 뒤 후손이 ‘신과 병’ 분리

‘일리아드’ 속 역병을 아폴론의 분노로 설명했던 고대의 ‘초자연적 질병관’

‘신성병에 대하여’ 저자는 자연적 원인 주장

질병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중대한 일이다. 그에 따라 질병은 오래전부터 의학책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도 중요한 소재나 주제가 되어왔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라고 일컬어지는 호메로스(Homeros, 기원전 8세기 무렵)의 <일리아드(Iliad)>에도 질병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니, 트로이 전쟁을 그린 이 방대한 영웅서사시는 다음과 같이 질병에 대한 묘사로 막이 열린다.

“수많은 용사를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하데스에게 다투어 보냈고, 수많은 영웅을 개와 독수리의 먹이가 되게 한 사태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 대왕과 아킬레우스가 언쟁을 시작한 날부터 비롯되었다. 그럼 대체 어느 신께서 이들에게 이러한 불행을 가져다주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폴론 신이니, 아가멤논이 자신의 사제 크리세스에게 불경하게 대한 데에 분노한 아폴론이 아가멤논에게 경고하는 뜻으로 역병을 보냈던 것이다.”

프랑스 조각가 롤랑(Philippe-Laurent Roland, 1746~1816)의 1812년 작품 <호메로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의 질병관을 잘 드러내고 있어 의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프랑스 조각가 롤랑(Philippe-Laurent Roland, 1746~1816)의 1812년 작품 <호메로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고대 그리스의 질병관을 잘 드러내고 있어 의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질병을 정령의 침입·신의 형벌로 이해

‘역병(疫病)’은 현대적 용어로 ‘전염병’에 해당하는데, 당시는 전염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으므로 대규모의 급작스러운 질병 발생을 뜻하는 역병으로 표현하는 것이 문맥상 타당할 것이다. 전시에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여러 지역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전쟁터로 집결해, 평시라면 한 지역에 국한되었을 전염병이 많은 사람에게 손쉽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고도로 발달한 살상무기를 사용하는 현대전 이전에는 전투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병사보다 전염병 때문에 신음하고 목숨을 잃는 이가 훨씬 많았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이 트로이 전쟁 때 끔찍한 역병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역사 기록은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발생 자체보다 더 주목을 끄는 것은 역병이 발생한 원인과 과정에 대한 호메로스의 설명이다.

아폴론 신전의 사제 크리세스는 그리스 군대에 억류된 딸을 찾기 위해 귀한 보석과 아폴론의 홀(笏)을 가지고 가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에게 공손하게 간청했다. “아트레우스의 두 아드님이시여, 그리고 모든 그리스인들이여. 올림포스 산정에 계시는 여러 신께서 당신들이 트로이를 정복하고 무사히 귀향하게 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보석과 아폴론 홀을 받으시고 제 딸을 풀어 주셔서 제우스 신의 아드님인 아폴론에게 경의를 표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지만 다른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애원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면전에서 모독을 하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야. 여기에서 더 이상 얼씬거리지 말라. 그대가 가져온 아폴론의 홀이나 보석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도다. 그대의 딸은 나와 해로할 때까지 내 집에서 길쌈도 하고 내 잠자리 시중도 들 것이다.” 공포에 질려 그 자리를 물러난 크리세스는 자신이 모시는 태양신 아폴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화살로써 제 눈물의 대가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충직한 크리세스의 기도를 들은 아폴론은 아가멤논과 그리스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에 대해 호메로스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폴론은 분노를 참지 못해 어깨에 활과 화살통을 메고는 올림포스 산에서 내려왔다. 등에서는 떨리는 노여움에 화살이 덜거덕거렸다. 아폴론은 밤처럼 어두운 얼굴을 하고는 그리스 함대로부터 저 멀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함대 한복판으로 은으로 된 화살을 날리니 죽음의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그리스인들의 개와 노새를 쏘아 죽였지만, 이어서 사람들을 겨누어 화살을 날려 보내니 종일토록 화장더미가 타올랐다. 아폴론이 꼬박 아흐레 동안 그리스인들을 향해 죽음의 화살을 쏘아대자, 열흘째 되던 날 아킬레우스가 전군을 소집했다. 그리스 사람들이 몰살되는 광경에 연민을 느낀 헤라 여신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현대의 작가라면 대규모 전염병 발생에 관해 병원성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언급하든지, 방역체계의 미비점 따위를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아폴론 신의 분노와 그에 따른 행동을 노래했다. 말하자면 (역)병은 신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호메로스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 당시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그 시절의 질병관(疾病觀), 즉 질병에 대한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질병관은 트로이 전쟁이나 호메로스 시대만의 독특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의 보편적인 관점이었다.

선사시대인들은 모든 사건을 귀신이나 정령(精靈)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질병도 역시 귀신이 저주하거나 몸속에 들어와 요동을 치기 때문에 생긴다고 여겼다. 고대문명이 시작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귀신 대신에 고등종교의 신이 등장했을 뿐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 산정에 살고 있는 신들이 인간들에게 벌로써 병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다른 신들도 그러한 일에 관여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질병의 신은 아폴론이었다. 아폴론은 질병의 신이면서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이기도 했다. 병 주고 약 주는 신인 셈이다. 병에서 낫기 위해서는 아폴론에게 정성껏 기도를 드려야만 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 의술의 한 모습이다. 호메로스는 그러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일리아드> 속에 형상화한 것이다.

선사시대와 고대 시대의 질병관은 얼마 전까지도 이어졌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십년 전까지 병이 생기는 경우, 의사와 병원을 찾는 대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고종의 왕비 민씨도 왕실에 환자가 생기면 궁궐 안 내의원(內醫院) 의사[醫員]의 진료를 받기보다 진령군 같은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곤 했다. 요컨대 초자연적인 질병관과 그에 따른 대응은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것이다.

‘신성병’ 대표 간질…비범함의 증거로

그런데 호메로스 시대보다 300여년 뒤에 당시로는 획기적인 새로운 질병관이 고대 그리스에 나타났다. <히포크라테스 전집(Corpus Hippocraticum)> 가운데 한 권인 <신성병에 대하여(De morvo sakro)>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무미건조하게 적혀 있다.

“신성병은 나에게 다른 질병들보다 더 신성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신성병 역시 다른 질병들처럼 자연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무지와 경이로움 때문에 이 질병의 원인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 병이 다른 병들과 전혀 달라 보여서, 그리고 질병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부족해서 이러한 신성 개념이 생겨나고 지속되어 왔다.”

세상에 신성(神聖)한 병이나 반대로 비천한 병이 따로 있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신성한 병과 비천한 병이 엄연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정한 병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심한 멸시와 차별을 받아왔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존재같이 취급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센병(나병)이다. 한센병은 다행히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으며 과거와 달리 증상이 그렇게 심한 병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센병 환자들은 신체적으로 큰 고통에 시달렸거니와, 그보다 더 기막히게 마치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인 양 세상으로부터 온갖 괄시와 모진 천대를 받았다. 생명은 붙어 있어도 사람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천형을 받고 낙인이 찍힌 것이었다.

반면에 신성하다고 여긴 병도 있었다. 어떤 병일까? 오늘날의 병명으로는 ‘간질’이다. 우리는 간질을 전혀 신성한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성한 병이라면 누구한테나 자랑하고 내세우고 싶은 병일 텐데 간질은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알까봐 애써 감추는 병이다. 하지만 고대 시대, 특히 서양에서는 간질을 신성한 병으로 취급했다. 신이 특별히 점지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병이라 생각했다. 고대 시대에 신성병을 가졌다고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과 로마 공화정 시대의 군인 정치가인 카이사르(기원전 100~40년)를 들 수 있다. 이들이 정말로 간질 환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신들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 징표로 신성병을 내세웠을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어쨌든 <신성병에 대하여>의 저자(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신성병, 즉 간질이 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른 질병들도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생기는 자연 현상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오늘날에는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지만 2000여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발상이었다.

요컨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일리아드>와 <신성병에 대하여>에 나타나는 두 가지 질병관이 공존했다. 이것들은 의학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다음 회에서 다룰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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